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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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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파도 파도 막말 대행진이다. 4·10 총선 더불어민주당 수원정의 김준혁 후보 얘기다. 이번에는 과거 저서에서 ‘유치원과 한유총(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뿌리는 친일’이라 주장했던 것이 알려져 논란이다. 1호 유치원인 경성유치원이 일제 강점기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졌고, 1995년 설립된 한유총은 그 후예로 정신적 친일파란 단순 논리다.

역시 ‘친일파’ 김활란 이대 초대 총장이 미 군정기 이대생들을 미군에 성 상납했다는 과거 발언으로 여성계로부터 후보 사퇴 요구를 받은 그다. 미 군정기 김활란, 모윤숙 등이 영어가 가능한 여대생을 동원해 “외교와 미군 장교 위안 명목의 ‘파티대행업’에 나선 것”(이임하 성균관대 박사후 연구원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을 ‘성 상납’이라고 냉큼 결론 내렸다. 여대생들이 ‘파티 주최자(호스티스)였다’는 미국 CIC(방첩부대) 보고서를 오독한 결과였다. 물론 이임하의 논문이 적절히 비판하듯,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해도” 전시 국가가 여성 지도자들의 주도적 역할 아래 여성성을 동원한 부끄러운 역사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과 ‘여대생 성 상납’은 다른 얘기다.

또다시 반복된 ‘비호감 선거’ 유감
분노·심판 에너지는 선거일까지만
이후엔 대화·타협 모드로 돌아서길

역사학자 출신인 김 후보는 이재명 당 대표를 정조에 빗댄 것으로 유명한 ‘친명’ 인사다. ‘궁중 에로’ 전문가를 자처하며 여성 비하와 술자리 음담패설 수준의 발언을 유튜브 등에 쏟아내 왔는데, 사고 회로가 의심스러운 수준 이하의 ‘아무말 대잔치’를 이 자리에 옮길 필요는 없겠다. 단,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는 큰 뜻에 흔들림 없다는 게 유감이다. 한편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용혜인 후보는, 야권 여성 의원들이 김 후보 발언에 침묵한다는 비판에 “민주 진보 진영 바깥에서 여성 의원에게 화살을 돌리려는 시도”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만약 상대 당 후보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결코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진영논리에 굴복한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율배반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이번 총선은 역대급 비호감 총선이 될 듯하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부적격 후보들이 보스에 대한 충성도와 친소 관계에 따라 공천심사대를 통과했다. 미래를 이끌 참신한 새 인물은 없고, 다시는 정치권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소생·귀환했다. 선거 캠페인 역시 막말과 저질 공세, 미래지향이라기보다 과거 응징, 극단적 진영논리와 팬덤 결집 수준을 벗지 못했다. 꼼수 위성정당이 다시 등장했고, 3지대는 존재감을 잃었다. 언제까지 ‘A가 좋아서가 아니라 B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어’ 투표소로 가야 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유권자도 많다.

이번 총선에서 “시대정신은 망가졌다. 원칙 있는 승리, 공정과 상식도 무너졌다. 주류 교체 전쟁과 패권 전쟁만 남았다.” 선거 전문가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쪽은 대통령과 정권의 ‘불통과 독단, 무능’에, 다른 한쪽은 야권 지도자의 ‘방탄과 복수극, 부도덕과 내로남불’에 분노하며 선거로 응징하려 한다. 중도층은 중도층대로 더 싫은 쪽을 혼내주기 위해 덜 싫은 쪽에 표를 던질 태세다. 역대 총선 중 최고 사전투표율이 보여주듯 그 열기는 뜨겁다.

그러나 분노와 심판의 열기는 딱 여기까지여야 한다. 이틀 후 성패가 갈리고 나면 한쪽은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분루를 삼킬 테지만, 이후에는 서로를 향한 적의와 분노를 거두고 타협하고 대화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서로를 향한 분노와 혐오의 정치, 극한투쟁의 정치가 얼마나 공동체를 분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지,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충분히 지켜봤다. 그게 다시 되풀이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지금 우리 앞에 산적한 미래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그래도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부여안고 투표소로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