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신념과 고집 사이: 의대 증원 2000명의 경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읽는 데 51분 걸린 지문 뒤 질문이 나왔다. 이 글의 요지는? ①2000명 증원 의지를 고수하겠다 ②2000명 증원을 꼭 고집하는 건 아니다.

이만하면 킬러 문항이다. 1만4000자 원고 중 ‘2000명’과 관련해 대화의 여지를 남겼다고 해석될 부분은 정확히 191자(띄어쓰기 및 문장부호 포함)였다.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는 구절을 포함한 네 문장이다. 그나마 이들 문장 바로 뒤에는 ‘하지만’이라는 역접 부사가 이어진다. 앞 네 문장이 전하고 싶은 요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담화문의 대부분은 ‘2000명’의 도출 근거와 정당성, 의료 카르텔 타파 및 국정 개혁 의지 등으로 차 있다. 보통의 문해력을 가진 수험생이라면 ①번을 택하는 건 당연할 터. 그런데 그날 저녁 KBS에 나온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②번이 정답이란다(“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 출제 미스인가, 독해력 부족인가. 혹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건가.

대통령 개혁 의지 평가할 만하나
‘2000명 마지노’가 해법 막아버려
소통하지 않는 의지는 고집일 뿐
총선 뒤 더 절실해질 정치의 공간

2000명이 절대적 숫자가 아니라면 왜 대통령 본인이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자존심 때문인가. 지금이 제왕무치(帝王無恥)의 시대도 아닐진대,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 리더십이다.

국민에게 문해력 ‘킬러 문항’을 냈다고 어깃장을 놓아봤지만, 사실 킬러 문항에 갇힌 이는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다. 여러 차례 2000명을 마지노선으로 제시하는 바람에 퇴로가 막혀 버렸다. 전장에서 가장 어리석은 진법이 배수진이다. 죽을 각오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때 택하는 마지막 방법일 뿐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너무 구체적 수치를 정해버림으로써 협상과 조정이라는 정치의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대통령은 건폭과 화물연대를 제압한 개혁 사례를 들었지만, 의사 집단은 이들보다 훨씬 교섭력이 강하다. 무엇보다 대체 가능성이 없다. 본분을 팽개친 의사의 집단행동에 국민은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대통령실과 정부가 거칠게 진격했다가 총선 앞에서 오히려 의사들에게 대화하자고 매달리는 양상이 됐다. 이러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망언이 명언이 될까 두려울 지경이다. 좀 더 정교한 접근이 필요했다.

답답한 것은 국민이다. 지난 2월 초 윤 대통령이 2000명 증원 카드를 꺼냈을 때 여론은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지금도 의사 대폭 증원에 대한 지지 여론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지금 국민이 듣고 싶은 건 당위성이나 의지의 되풀이가 아니라 해법이다. 취임식 넥타이를 매고 나온 대통령은 ‘초심’을 역설했지만, 국민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그건 알겠고, 그래서 어떻게 풀려고?”를 국민은 묻고 있다.

정치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 오직 의정 갈등에서뿐이랴. 윤 대통령 집권 2년 내내 협상과 조정이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이 멈췄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엔 혐오와 배제가 판을 쳤다. 거대 야당의 횡포가 이유라지만, 국정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내키지 않더라도 야당에 손 내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드물었다. 자신을 대통령 자리에 올린 선거연합마저 해체해버리고 오직 ‘의지’에 기대 국정을 돌파하려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그 과정에서 오만과 불통의 이미지가 입혀졌다. 3대 개혁 같은 굵직한 국정과제의 해결 동력마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총선에서 여당이 고전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유권자의 회의일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신념 윤리’만큼 중요한 것이 ‘책임 윤리’라고 베버는 강조했다.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신념에 따른 정열, 그에 따른 책임감, 그리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직업으로서의 정치』) 국민이 정치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본인의 신념뿐 아니라 그 신념을 어떻게 현실화하겠다는 해법(solution)이다. “잘하겠습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외치는 신입사원을 보는 상사의 답답함을 국민은 윤석열 정부에 느끼고 있다.

고집이 신념으로 승화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신념이 고집으로 여겨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소통하지 않는 신념은 제3자의 눈에는 고집일 뿐이다. 버락 오바마는 “나의 신념은 어느 정도의 의심은 인정하는 신념”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달인이라는 오바마의 말을 신념의 정치인을 자부하는 윤 대통령이 참고했으면 한다. 니체는 “열정으로부터 견해가 생기고, 정신적 태만이 이를 신념으로 굳어지게 한다”고 설파했다. 의심하지 않는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향해 팔을 뻗는”(‘맨 오브 라만차’ 중) 낭만주의가 아니라면 신념은 현실에서 벼려져야 한다. 여의도 정치를 욕하지만, 그게 정치의 현실이다. 어쩌면 총선이 끝난 뒤 더 절실해질지 모를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