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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팬덤 포퓰리스트 정당의 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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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상훈 정치학자

박상훈 정치학자

과거 누군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개탄했지만, 지금 우리는 ‘죽은 정치가의 사회’ 내지 ‘정치가가 사라진 민주주의’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시인의 상상력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 문제가 있듯, 정치가다운 정치가를 기대할 수 없게 된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위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체제다. 특정 혈통이나 특출한 가문에 통치를 맡기는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달리, 민주주의는 시민이 적법하게 선출한 정치가에게만 통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 나쁘면 민주주의도 나쁘기 마련이고, 선거가 좋은 정치가를 뽑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으면 좋은 정치, 좋은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트럼프나 러시아의 푸틴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독재자’를 만날 수도 있고, 오늘날 우리처럼 판사·검사·변호사·법대 교수 출신이 선거를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심판·청산 앞세운 법률가의 정치
공존과 타협 모색 정당정치 위협
입법자를 뽑는가, 투사를 뽑는가
여론조사가 공천 좌우해선 문제

이미 행해진 일을 두고 다투는 법률가와 달리, 정치가는 앞으로 행해져야 할 일을 다룬다. 법률가가 법의 처분을 통해 누군가의 과거 행적을 심판하고 청산하는 일을 한다면, 정치가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변화와 개선의 여지를 넓히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 법률가는 권력 지향적이거나 당파적이지 않을 때 제역할을 한다. 정치가는 다르다. 정치가는 권력을 추구한다. 오래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강조했듯, 정치가란 권력을 이해하고 선용할 수 있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정치가는 당파적 입장 없이 행동할 수 없다. 성장파인지 복지파인지, 동맹파인지 평화파인지와 같은 정견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가 행사할 권력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인간 사회든 정치가는 책임있게 길러져야 하는바, 그 일이야말로 정당에 맡겨진 민주적 소명이다.

정치가 좋아야 민주주의도 가치가 있다. 그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시민 집단들이 가진 이해관계와 열정은 갈등적이다. 정치는 그런 갈등 속에서 일하고, 해결할 수 없는 시민들의 요구 사이에서 공존과 타협의 길을 낸다. 그렇게 도달한 공적 결정이라야 정치는 권위를 갖는다. 그래야 여야를 달리 지지하는 시민들도 법률과 공공정책에 순응할 수 있다. 여야 정당에 의한 상호 책임의 정치 없이 공동체의 안녕과 통합을 이끌 수 있는 민주주의란 없다. 선거가 정당이 양성해 낸 좋은 정치가를 선발하는 시민 잔치이자 시민 총회의 역할을 해줘야 좋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면 공천도 선거도 정치 밖에 있어야 할 사회적 강자들을 불러들이는 투기장으로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정당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는 악몽 중에도 가장 무서운 악몽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덧 우리 현실이 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정치가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국민이나 당원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국민 직접민주주의의’와 ‘당원 직접민주주의’의 주장이 한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이번 총선은 그 결정판을 보여주었다. 공천에서 정당들은 국민과 당원의 참여를 최대화했다. 그 방법은 여론조사였는데, 여론조사가 이번처럼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런 공천 방법에 들어간 돈이 엄청났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조사비 모두 공천 신청자들이 부담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여론조사 업체들은 돈을 벌었다. 정당은 ‘공직 후보자 양성 기관’이라는 본래 역할 대신 돈 받고 인력 채용을 대행하는 기관 역할을 했다. 열성적 참여 의지를 발휘한 팬덤 시민과 팬덤 당원들은 원하는 조사 결과를 성취해냈다. 팬덤 포퓰리스트들은 한결같이 ‘국민주권’과 ‘당원주권’을 이상화한다. 그들이 설계한 국민 참여, 당원 참여 방법으로 팬덤 포퓰리스트들은 이번 공천에서 최대 승리를 거뒀다. 그러는 사이 정당은 팬덤 리더와 팬덤 당원만 있으면 되는 팬덤 정당으로 변모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꼭 있어야 할 ‘당내 다원주의’는 사라졌다. 승자가 정의를 독점하고, 이견은 곧 이적으로 취급받았다.

모두가 참여를 말하고 민심을 따른다고 하지만, 선거가 입법자를 뽑는 것인지 투사나 전사를 뽑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당만 남고 나머지 정당들은 사라지기 바라는 ‘일당제주의 심리’가 열성 지지자와 열성 당원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상대 당에 대한 적개심, 패배에 대한 공포, 그래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조바심만 있다. 전보다 더 무례하고 공격적인 시민들이 늘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열광적 지지가 다른 이들에 대한 억압을 동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정당이 더 이상 정치가다운 풍모나 기품을 가진 이들을 길러낼 수 없게 된 현실에 있다. 한국의 정당은 팬덤 포퓰리스트의 야심을 실현하는 도당(徒黨)처럼 변하고 있다.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