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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빈곤해지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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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사회부 기자

한영익 사회부 기자

서울·부산 등 전국 사전투표소 40여 곳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한 유튜버와 공범이 최근 구속됐다. 이들은 “사전투표 인원을 직접 세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부정선거 의혹에 과몰입해 직접 행동에까지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선관위는 30년 만에 총선 개표 과정에서 수검표를 부활시켰다. 사전투표함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도 시·도 선관위 청사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24시간 공개한다. 2022년 대선 ‘소쿠리 투표’ 논란으로 신뢰도에 타격을 입은 선관위가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택한 조치다.

경남 양산 사전투표소에서 발견된 불법 카메라. [연합뉴스]

경남 양산 사전투표소에서 발견된 불법 카메라. [연합뉴스]

불법 카메라 설치와 30년 만의 수검표는 한국 사회의 신뢰자본이 갈수록 빈약해지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한 장면이다. 진영을 바꿔가며 10년 넘게 장기간 확산 중인 선거부정 음모론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012년 대선 직후에는 ‘나는 꼼수다’가 디도스 의혹을, 2020년 총선 이후엔 보수 유튜버들이 사전투표 의혹을 확산시켰지만, 수검표 부활로까지 이어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투개표시스템, 지지하지 않는 정치 세력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강하단 의미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23 레가툼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세계에서 107위로 종합 순위(29위)에 비해 크게 뒤처졌다. 특히 사법시스템(155위)·군(132위)·정치인(114위)·정부(111위) 등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 지수가 낮았다.

국제조사기관 ‘월드 밸류 서베이’의 2017~2022년 조사에서도 한국인들의 행정부에 대한 신뢰도(12.9%)는 일본(50.0%)·멕시코(51.3%)보다 낮았다.

불신 사회에서는 추가 비용을 지출하는 게 필수적이다. 총선 수검표에 차출을 앞둔 공무원들은 1월 세종에서 집회를 열고 “강제 동원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공무원 5만명에 대한 수당도 최소 60억원 이상이 투입될 예정이다.

선택의 폭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스웨덴은 선거일 18일 전부터 장기간 사전투표를 한다. 사전투표를 했더라도 마음이 바뀌면 본 투표일에 다른 후보에게 재투표하는 게 가능하다. 공적 제도,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튼실한 신뢰 자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묘기에 가까운 선거 시스템이다.

“불신의 벽이 경제성장률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지적은 10여년 전부터 경제단체에서 꾸준히 나왔다. 정부와 정치권이 30년 만의 수검표가 갖는 사회적 의미도 되새겨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