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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엘리트 코스'도 옛말…작년 경제 부처서 사무관 23명 떠났다 [젊은 공무원 엑소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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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소재 경제 관련 부처에서 근무했던 사무관 A씨는 최근 사직서를 냈다. 만 3년 넘게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A씨는 전문성을 갖춘 경제 관료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3년 차에 접어들 때쯤부터 회의감이 몰려왔다. 퇴직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국회 법안심사를 준비할 때였다. 물밀듯 들어오는 요청에 과장급 고참과 설명 자료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정책 방향은 부처 의견보다 정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고 느꼈다. A씨는 “대기업 대비 낮은 급여와 야근 등은 어느 정도 감수했다”며 “정책으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보람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고위직 공무원의 관문인 5급 공무원(사무관)의 ‘탈(脫) 관직’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과거에도 국·실장급 이직 사례는 꾸준히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과장급에 이어 5급 사무관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는 추세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5급 공무원의 자발적 퇴직자 수는 지난 2020년 371명에서 2021년 464명, 2022년 500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눈에 띄는 건 과거 국가 경제·산업을 이끌며 ‘엘리트 관료 코스’로 불리던 주요 부처에서의 이탈이다. 25일 인사혁신처와 각 부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토교통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기획재정부의 5급 사무관 자발적 퇴직자(장기근속 명예퇴직자 제외)는 평균 5.75명이었다. 고용부에서 5명, 나머지 부처에선 각각 6명씩 퇴사했다.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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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엔 20~40대 젊은 사무관도 다수 포함됐다. 산자부의 경우 2022년 3명에 이어 지난해에도 5급 공채 출신 사무관 2명이 퇴직했다. 기재부에선 지난해 말 사무관 3명이 법학전문대학원에, 1명이 치의학전문대학원에 각각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조직이 술렁이기도 했다. 8년 차 기재부 소속 한 사무관은 “또래 사무관들을 만나면 대부분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2년마다 다른 일”…전문성 쌓을 틈 없는 순환보직

공직의 꽃으로 불렸던 5급 사무관들의 의지가 꺾인 이유는 복합적이다. 중앙일보가 최근 5년 내 스스로 퇴직한 5급 공무원 5명과 퇴사를 고민 중인 사무관 5명을 인터뷰한 결과, 전문성을 쌓을 수 없는 인사 구조에 대한 불만이 컸다. 1~2년에 한 번씩 담당 부서가 바뀌는 순환보직 체계가 대표적이다. 기재부에서 나와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B씨는 “순환보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전문성 제고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나중에 다시 공직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만의 전문성을 가질 수 있길 바라며 퇴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서 퇴직한 C씨(26)도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는 보직 구조와 낮은 자율성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무관들은 일하는 마음가짐까지 달라진다고 입을 모았다. 한 경제부처에서 자료 분석 업무를 맡은 사무관 D씨는 “예산·기획 부서에서 일이 손에 익을 때쯤 새로운 곳으로 발령이 났다”며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이 안 드는 안일한 스스로의 모습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국회서 무한대기”…정권 바뀌면 감사 대상

최근 젊은 사무관 사이에선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국정감사 때 새벽까지 무한대기를 하거나, 비서관이 국·과장을 오가라 하는 국회의 행정부 길들이기 같은 것들이 업무 역량을 온전히 정책 만들기에 쏟을 수 없게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600개에 가까운 공감과 370여 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화제가 됐다. A씨는 “추가경정예산이나 각종 세제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부처 역할이 미미한 것을 보고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국회 상임위가 열리자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회의장 주변에 대기하며 답변 준비를 하는 모습. 중앙DB

국회 상임위가 열리자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회의장 주변에 대기하며 답변 준비를 하는 모습. 중앙DB

산자부에선 최근 몇 년 사이 원전·에너지 등 정책을 담당했던 고위직이 감사나 수사를 받는 일이 잇따르면서 사무관의 동요가 컸다. 실제로 월성1호기 폐쇄 업무를 맡았던 당시 국·과장과 서기관 등은 1년 넘게 감사를 받다가 퇴직했고, 태양광 등을 담당했던 공무원들도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산자부 소속 사무관 E씨는 “선배들이 갑자기 쫓겨나듯 공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자긍심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승진 적체도 불만 요인이다. 세종의 한 부처에서 인사 관련 업무를 하는 김모(36) 사무관은 “지난해 말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하는 동기가 4급 서기관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동기는 어느새 관리자가 됐는데 매주 세종과 서울을 오가며 실무자로 일하는 자신을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동원 인천대 행정학과 교수는 “5급 공무원은 전문성을 많이 발휘하고 자기 경력을 개발해야하는 위치”라며 “승진 등 경제적 보상과 자신의 역량을 쏟고 성과를 확인할 기회가 중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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