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좌표찍기 참아야하나요…공노비 되려 공부 안했다" [젊은 공무원 엑소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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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지방의 한 시청에서 근무하는 8급 공무원 A(34)씨는 정신질환을 앓는 노숙인의 계속되는 업무방해를 견디다가 결국 경찰에 신고를 했다. 사진 A씨 제공

지난해 8월 지방의 한 시청에서 근무하는 8급 공무원 A(34)씨는 정신질환을 앓는 노숙인의 계속되는 업무방해를 견디다가 결국 경찰에 신고를 했다. 사진 A씨 제공

지방의 시청 8급 공무원 A씨(34)는 지난해 8월 근무 중 112신고를 했다. 대상은 정신질환을 앓는 노숙인이었다. 유일한 보호자인 의붓형이 사망하면서 노숙을 시작했다는 사연에 A씨와 동료들은 그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해주고 임대주택에 살 수 있게 도왔다. 하지만 이후 그는 하루가 멀다고 사무실에 들이닥쳐 라면·즉석밥 등 물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A씨는 “화를 낼 수도 없고 인내심의 끓는 점이 낮아지는 느낌이었다”며 “악성 민원이 늘면 늘었지 줄지 않을 것 같아서 공무원을 계속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젊은 공무원이 공직을 떠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대민 업무 스트레스다. 연차가 낮을수록 민원 업무부터 맡는데 이 과정에서 감정 노동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공직을 이탈하는 공무원이 느는 추세다. 지난해 교도소에서 출소한 민원인을 지원하러 집에 방문했다가 “아가씨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는지방직 B씨는 “이 일 뒤론 가정방문 업무가 두려워 퇴직을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설문한 퇴직 공무원 30명 중 15명(중복응답)도 악성민원 등 과도한 업무를 이유로 사표를 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인사혁신처가 처음으로 중앙행정기관 소속 공무원 1만 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가공무원 감정노동 실태조사’ 결과 폭언·협박 등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감정노동은 정서적 손상, 감정 부조화를 초래하는 ‘위험’ 수준이었다. 원인으로는 ‘장시간 응대, 무리한 요구 등 업무방해(31.7%)’가 가장 많았고, 폭언·협박(29.3%), 보복성 제보·신고(20.5%) 등이 뒤를 이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지방직 공무원 C씨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러 온 민원인에게 필요한 자료를 안내했는데 ‘뭐가 이렇게 많냐’며 종이를 던진 적이 있다”며 “이후 컴퓨터 뒷면에 ‘CCTV 녹화중’이라는 문구를 붙였다”고 토로했다. 서울의 한 보건소에 근무하는 윤모씨는 “업무는 사무직이지만 민원인을 상대하는 서비스직, 야근은 3D(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업종”이라며 “공무원은 단점을 다 합쳐놓은 직업 같다”고 말했다.

기관 홈페이지 등에 공무원 이름과 담당 부처, 연락처 등이 공개되면서 이른바 ‘좌표 찍기’ 사례도 늘었다. 특정 민원과 관련해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 폭탄’ 공세로 압박하는 것이다. 지난 5일 사망한 김포시 9급 공무원(39)도 생전 도로 보수공사와 관련해 온라인 카페에서 신상정보 공개 글과 집단 민원 종용 글, 인신공격성 글 등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대전시청에서 복지 업무를 담당하는 이모씨는 “요즘 세상에 어떤 직업이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는지 모르겠다”며 “공(公)노비가 되려고 공부한 게 아닌데 속상하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사망한 경기 김포시 9급 공무원(39)을 위해 마련된 추모공간. 숨진 공무원은 온라인 카페에서 신상정보 공개 글과 집단 민원 종용 글 등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뉴스1

지난 5일 사망한 경기 김포시 9급 공무원(39)을 위해 마련된 추모공간. 숨진 공무원은 온라인 카페에서 신상정보 공개 글과 집단 민원 종용 글 등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뉴스1

대민 업무 스트레스는 특히 MZ세대 공무원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병윤 행정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MZ세대 공직자들의 공공봉사동기’ 보고서에서 “젊은층은 투명한 절차와 합리적인 설명, 정당한 보상을 추구하는 권리 의식이 뚜렷하다”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고 부당한 지시나 처우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도 “MZ세대는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게 특징”이라며 “공무원이 되기 워낙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탈하는 건 그만큼 직업 환경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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