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고확률 10억년 1번"…빌 게이츠가 동네 원전 꽂힌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3면

‘AI 시대’ 게임체인저 된 미니원전

경제+

PC시대 주역 빌 게이츠와 생성 인공지능(AI)시대를 연 샘 올트먼.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의외의 분야에 있다. 원자력 발전이다. 대형 원전이 아니라 이를 10분의 1 크기로 줄인 ‘미니원전’, SMR(Small Modular Reactor)이다. 빌 게이츠는 2008년 SMR 기업 ‘테라파워’를 직접 설립했고, 샘 올트먼도 2014년부터 SMR 개발사인 ‘오클로(Oklo)’에 투자했다.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이들이 왜 중후장대한 하드웨어 원전에 꽂혔을까. 뜯어보면, 이면엔 AI 패권을 잡기 위한 빅픽처가 있다.

1. AI 패권 잡는 빅픽처 SMR…빌 게이츠, 아예 회사 설립 

◆AI의 주식(主食), 전기=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을 내듯, AI도 전기가 있어야 데이터를 학습하고 사용자 요구를 처리한다. 거대한 데이터 센터를 돌릴 전기 쟁탈전은 AI시대 개막과 함께 예고된 전쟁이다.

요즘 AI 관련 힘깨나 쓴다는 기업 머릿속엔 ‘에너지’라는 단어가 가득하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AI 시대에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고, 에너지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SMR 스타트업인 오클로를 인수했고, 핵융합 연구 스타트업인 ‘헬리온 에너지’에도 3억7500만 달러(약 4900억원)를 직접 투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2027년까지 AI 서버가 연간 소비할 에너지의 양은 85~134테라와트시(Twh)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중이다.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스웨덴의 연간 전기 사용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미지·영상까지 처리 가능한 멀티모달 생성AI 서비스가 늘면 전기 사용량은 더 높아질 수 있다. IT 전문매체 ‘더 버지’에 따르면, 이미지 생성AI는 텍스트 생성 AI보다 전기를 61배 더 많이 쓴다. AI 탓에 미국 내 전기 공급 부족을 우려하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전기는 더 필요한데 친환경 에너지는 고비용이라는 한계가 있다. 탄소를 배출하는 화력 발전소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 0으로 낮추겠다’(넷 제로·Net Zero)는 국제조약 ‘파리협정’에 위배된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게 SMR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 SMR, 뭐가 다른가=한국말로 ‘소형모듈원자로’. SMR은 일반 원전보다 크기가 작고, 공장에서 전부 제작 가능해 설치 비용이 적다. 냉각수도 덜 필요해 바다가 아닌 내륙 한복판에도 지을 수 있다. 특히 전기가 필요한 곳 바로 옆에 원전을 설치할 수 있기에 SMR이 보완재가 아닌 ‘게임 체인저’가 될 거란 기대가 나온다.

그래도 개수가 많아지면, 더 위험한 거 아닐까. 최근 원전 사고는 대부분 핵분열로 에너지를 내는 연료봉을 식히는 데 실패해 발생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도 그랬다. SMR은 소규모라 전기가 끊겨도 자동으로 열을 식히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열밀도(단위 부피당 나오는 열의 양)가 높은 뜨거운 물이 위로 올라가 공기에 닿으면, 온도가 낮아져 내려오는 방식이다. 임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본부장은 “중대사고 발생 확률 기준, 최신 원전은 100만년에 한 번 사고가 발생하는 수준으로 설계됐다”며 “SMR의 경우 10억년에 한 번이 목표라 방사능 유출 등 사고 가능성이 일반 원전보다 낮다”고 말했다.

또 SMR은 용기 안에 모든 부품을 넣은 일체형이다. 공장에서 제작을 마치고 그대로 실어 원하는 곳으로 옮긴다. 10조~15조원 소요됐던 건설 비용을 5000억원까지 줄일 수 있다. SMR 형태가 옆으로 뚱뚱하지 않고 위아래 길쭉한 이유도 육상, 철도 운송을 위해서다.

전기를 쓰는 현장 근처에 만들 수 있어 송전탑도 최소화할 수 있다. 국내 원자력 연구기관 관계자는 “SMR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방안일 수 있다”며 “한국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다른 대안이 딱히 없다”고 말했다. 통상 SMR은 16~23m로 아파트 8~9층 높이만 한 크기다. 전기를 많이 먹는 반도체 단지, 데이터센터 옆에 놓으면 적당한 크기다.

2. 원전 비용 30분의 1로 줄어…업계 “사고확률 10억년 1번”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절대강자 없는 춘추전국시대=SMR 시장은 현재 절대 강자가 없는 초기 단계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SMR 디자인은 80개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운용 중인 국가는 러시아(1기), 중국(2기)뿐이다. 미국도 아직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러시아, 중국은 안전성 검증기준이 선진국에 못 미친다. 현재로썬 미국 민간 기업들이 시장을 이끌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영국 국가원자력연구원(NNL)은 2035년 SMR 시장이 최대 5000억 달러(약 650조원), 원전 개수로는 300기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 기업들도 제조업 역량을 앞세워 뛰어들었다.

미국 민간 기업 가운데 2007년 설립된 뉴스케일 파워가 개발 중인 SMR의 최대 특징은 안전이다. 전기 출력을 낮춘 SMR을 12개씩 묶어서 설치한다. 중대 사고가 발생해 핵연료봉 냉각이 어려워질 때 원자로가 과열되지 않고 안전하게 유지되는 시간이 기존 원자로가 3일 정도라면, 뉴스케일의 SMR은 무기한이라는 게 회사 측 주장이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2020년 8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안전성을 입증받아 설계인증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2008년 설립한 테라파워는 주요 SMR 기업보다 상용화 속도가 느리지만, 가장 발전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원자로를 냉각시킬 때 기존에 쓰던 물 대신 나트륨(소듐)이나 용융염 등을 사용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정용훈 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냉각수 대신 나트륨과 용융염 등을 냉각재로 쓰는 SMR 기업 중 테라파워가 가장 수준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기술 난도가 높아 개발 성공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3. 절대강자 없는 춘추전국…원자력연구원도 도전장 

안전성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상용화 속도만 놓고 보면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앞선다. 중국은 지난해 북부 룽청시에 지은 SMR이 전력 생산을 시작했고,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남부 하이난성 창장에 ‘링룽 원’도 짓고 있다. 러시아는 2020년 세계 최초로 배 위에 SMR 원자로 2기를 얹은 ‘아카데믹 로모노소프’를 가동 중이다.

한국도 제조역량을 앞세워 SMR 시장을 공략 중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12년 자체 개발한 SMR인 ‘SMART’는 그간 건설 부지 확보와 탈원전 정책 등으로 사업에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캐나다로 수출을 시도 중이다. 강한옥 한국원자력연구원 SMART개발단장은 “자국 규제기관(원자력안전위원회)으로부터 SMR이 표준설계인가를 받은 국제 사례는 2012년 SMART가 처음인 만큼 국내 기술 완성도가 높다”고 말했다.

SMR의 장점이 분명하지만 해결해야 할 난제도 수두룩하다.

우선 기술 표준화가 쉽지 않다. SMR 내부 핵연료 냉각재로 물, 나트륨, 납, 고온가스, 헬륨 등이 채택되고 있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어 아직까진 글로벌 표준이 없다.

가장 큰 과제는 여론이다. 이론적으로 안전하다는 사실과 ‘어쨌든 원전’이라는 현실적인 걱정은 별개다. SMR이 상용화되려면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하는데, 쉽지 않은 과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