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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독일보다 월등…부채 외면 정치 포퓰리즘 해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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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로 늘어난 자연재해, 고령화에 따른 복지 비용, 일자리 창출까지…. ‘돈 들어갈’ 곳이 점점 많아진 각국 정부는 나라 곳간을 어떻게 불리고 아껴서 써야할지 말 그대로 ‘재정전쟁’에 돌입했다. 부채가 늘어라도 꼭 필요한 곳에는 돈을 풀되, 별 효과도 없이 나가는 돈은 정확히 파악해 혈세 낭비를 막는 국가 재무 관리가 절실한 이유다.

한국의 2022년 말 국가채무(중앙정부+지방정부)는 1068조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지급해야 할 공무원·군인연금 등을 넣어 계산하면 채무 규모는 2326조원으로 불어난다. 여기엔 9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 적립금과, 결국 정부가 갚아야 할 공기업 부채는 빠져 있다.

국가 회계 전문가로 꼽히는 제이콥 솔(Jacob Soll)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회계학 교수는 “선거철을 앞두고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는 등 많은 민주주의 국가의 나라 살림 관리 수준은 생각보다 허술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 그리스·포르투갈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유럽연합(EU)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고, 2017년 그리스 정부의 재정 자문으로 활동했다.

중앙일보는 한국회계기준원 세미나 참석차 방한한 솔 교수를 지난 14일 인터뷰했다. 그는 “국가 회계 관리는 곧 포퓰리즘 정치에 무너지는 현대 민주주의를 구출하는 문제와 직결한다. 국가 회계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회계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세미나 참석차 방한했다. 김종호 기자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회계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세미나 참석차 방한했다. 김종호 기자

“트럼프식 관세, 세계경제 파괴될 것”

자유 무역의 전도사였던 미국이 보호주의로 선회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전반적인 무역 정책 기조는 보호주의가 아니지만, 일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보호주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치고 올라오는 중국, 전쟁을 벌이는 러시아 등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핵심 전략산업이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전기차 등 녹색 산업 없이는 장기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보호주의는 더 강해질텐데.
트럼프 주장대로, 모든 수입품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에 60%의 관세를 부과한다면 세계 경제는 파괴될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되더라도 그 정도로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은 쓰지 않을 거다. 다만 트럼프는 과거에도 프랑스산 와인에 관세를 매겼다가 철회하는 등 실행 불가능한 관세 정책을 앞세웠다. 트럼프가 독재자처럼 행동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경제, 독일보다 월등…세계 6위될 것” 

한국은 미국의 자유 무역 질서 아래 성장했는데 걱정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은 자유 무역이 아니라 정권의 보호주의 산업 정책으로 부유해진 나라다. 국가의 보호 아래 독점의 혜택을 누린 재벌 기업들의 성공이 성장의 발판이 됐다. 그런 면에서 ‘가장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나라(the most successful unhappy country)’다. 앞으로 한국 수출에 가장 큰 어려움을 줄 나라는 미국보단 중국일 거다. 과거 중국이 한국에 대해 무역을 무기로 사용했던 사례들을 보라.
미·중 갈등 속에 한국은 어떤 전략을 펴야할까.
중국은 독재 국가다. 독재 정권은 러시아의 푸틴처럼 누군가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숨겨진 국가 부채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폐쇄적인 나라다 보니, 정부가 제시하는 경제 지표도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한국은 미국은 물론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불행한 역사도 있었지만, 일본과도 가깝게 지내야 한다. 한국 경제는 첨단·제조기술 면에서 독일보다 월등하고 시스템도 정교하다. 한국이 고등 교육에 계속 투자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세계 6위 경제 대국이 될 거라고 본다.

한국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문제가 시한폭탄으로 꼽힌다. 정부는 건설사·금융권 위기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나
자유 시장주의자는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 개입에 반대한다. 하지만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회사에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정부는 똑똑하게 시장에 개입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이는 정부가 얼마나 ‘똑똑한 회계 정책’으로 공적자금을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은 머지 않아 세계 6위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종호 기자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은 머지 않아 세계 6위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종호 기자

솔 교수가 강조하는 ‘똑똑한 회계 정책’이란 발생주의 국가 회계를 의미한다.
기업들은 미래에 갚아야 할 부채, 언젠가 받게 될 상품 대금(매출채권) 등을 모두 기록한 이른바 ‘발생주의 재무제표’를 만들고 이에 따라 경영 판단을 내린다. 시점에 관계없이 재무 상태에 영향을 주는 ‘사건의 발생’ 여부가 회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는 갚아야 할 시점이 정해진 부채(확정채무)와 한 해 동안의 수입·지출을 중심으로 국가 예산을 짜고 의사 결정을 한다. 가계부처럼 현금이 들어오고 나갈 때 기록하는 ‘현금주의’ 방식이다. 각자 장·단점이 있지만 발생주의 회계를 해야 자신이 가진 진짜 자산과 부채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 자금 흐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발생주의 회계, 정치적 결단 필요”

발생주의 국가 회계가 필요한 이유는.
한국만 해도 정부 재무제표에 공기업 부채나 국민연금 충당부채 등은 표시돼 있지 않다. 만약 발생주의에 따라 모든 부채를 포함하면, 국가 부채 규모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측정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이 포괄적인 발생주의 국가 회계를 활용해 (저출산·고령화 등) 닥친 위기에 잘 대처하길 바란다. 특히 정치권을 움직이려면 회계 문제를 국민이 공감할 수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솔 교수는 발생주의 국가 회계의 모범국으로 뉴질랜드를 꼽았다. 뉴질랜드는 매 4년마다 미래 40년 동안 예상되는 인구 변화에 따라 정부 재무 상태를 파악한 ‘장기 재정상태표’를 발간한다. 정부가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분석해 세금과 예산을 조정하고 부채 급증을 막을 수 있는 정책을 검토한다. 여기에는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 구조 변화는 물론 기후변화와 노동 생산성 변화 등 경제적 충격 요인들도 포함된다.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위기에 대처하려면 발생주의 국가 회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종호 기자

제이콥 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위기에 대처하려면 발생주의 국가 회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종호 기자

“연금부담, 솔직히 밝히고 관리해야”

국가가 발생주의 회계를 도입하면 부채 규모가 늘어 정부가 긴축 정책만 펴려고 하지 않을까.
연금 등 나랏빚 부담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더 잘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발생주의 국가 회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2015년 한국의 공무원 연금 개혁을 높이 평가한다) 또 국가 부채를 갚기 위해 국가 자산을 민간에 매각하는 정책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민영화 방식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공공이 조성한 펀드로 국가 자산을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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