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금고에 현금 너무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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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거래소 상장 업체(금융회사 제외) 셋 중 한 군데는 현금성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사실상 무차입 기업'인 것으로 조사됐다. 상장 기업의 3분의 1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빚을 청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금성 자산이란 현찰에 예금.유가증권처럼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더한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30일 '국내 기업의 현금보유 과도한가'라는 보고서를 냈다. 결론은 '과도하다'였다. 보고서를 보면 현금성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기업은 579개 업체 중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등 189곳(32.6%)이었다. 이 중 KT&G.강원랜드 등 71곳은 아예 차입금이 없었다. 이에 따라 전반적인 부채비율이 선진국 기업보다 낮았다. 우리나라 상장 제조기업의 부채비율은 79.8%인데 비해 미국은 130.4%, 일본은 124.1% 였다.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부채 비율이 10%가 안 되는 제조업체가 한국전기초자(5%), 영풍제지(9%) 등 다섯 곳에 달했다. 차입금 대비 현금성 자산의 비율은 우리 상장 제조업체들이 54%, 일본은 46%, 미국은 35%였다. 그만큼 우리 기업들의 부채는 적고 현금성 자산이 많다는 얘기다.

한국 상장기업 전체의 현금성 자산은 외환위기 발발 무렵인 1997년 말 27조4000억원에서 지난 9월 말 64조원으로 늘었다. 상장 기업 한 곳당 평균 현금성 자산은 같은 기간 455억원에서 1102억원으로 증가했다. LG연구원은 보고서에서 " 고유가.원화 강세 등으로 경영 여건이 악화되고 내년 대선 등으로 경영 환경이 불투명해지면서 기업들이 몸을 사려 현금을 계속 쌓아 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LG연구원은 선진국에 비해 우리 기업의 현금 보유가 과도하다고 진단했다. 현금이 너무 많으면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까지 손댈 위험이 있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업 사냥꾼이 금융 회사를 찾아가서 "A기업을 M&A 하려는데 지분 30%만 사들이면 된다. 30%를 살 수 있는 돈을 꿔 달라. A기업은 현금이 많으니 M&A한 뒤에 바로 갚을 수 있다"는 식이다. 특히 보유 현금성 자산으로 최대주주 지분보다 더 많은 주식을 살 수 있는 회사들이 적대적 M&A 위험이 큰 것으로 분류됐다. 이런 곳들이 S사.H사 등 28%(162개사)였다.

연구원의 이한득 연구위원은 "금고 속의 현금은 기업가치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다"며 "좋은 사업 기회를 발굴하기 어렵다면 배당금 지급과 자사주 매입 등으로 주주가치를 높이는 게 그나마 나은 현금 관리 방안"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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