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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 원칙 다시 세운 것" vs "과거 성범죄 판결로 역주행" [천대엽 판결 후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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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천대엽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의 지난 1월 판결로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다시 강조하는 변화가 생긴 데 대해 법원 안팎의 평가는 엇갈렸다. 일부 판사들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무죄추정의 형사법 대원칙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2018년 당시 박정화 대법관의 성인지감수성 판례를 ‘가해자 시선’으로 뒤집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법원 내 일부는 천대엽 판결이 지난 6년간 피해자 진술에 지나치게 신빙성을 부여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었다고 해석한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애초에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결 내용이 무죄추정의 원칙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 그간 피고인 스스로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그것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 역시 “피고인에게 무죄를 내렸다가, 인신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걱정하는 판사들이 많았다”며 “판사들에게 숨통을 틔워준 판결”이라고 했다.

반면에 피해자에게 ‘항거불능’ 상황이었음을 입증하라던 과거로 역주행한 판결이란 부정적 평가 역시 나온다. “2018년 성인지감수성 판결을 단순히 ‘피해자 편을 들라’로 오독하던 사람들은, 2024년 판결을 보고 ‘피해자 편을 들지 말라’로 거꾸로 오독할 수 있다(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것이다.

“새 대법원 판결 때문에 유죄를 무죄로 바꾸진 않지만, 무죄 판결을 쓰려고 할 때 마침 저런 알토란같은 문구가 대법원 판례로 있으면 가져다쓰기 편리한 건 사실”(지방법원 부장판사)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또 다른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평범한 말을 썼더라도 대법원 판례에서 쓰였다면 무게감이 다르다”며 “무죄 결론을 낼 때 얹을 수 있는 강력한 문장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도 했다.

대법원에서도 “민유숙 대법관이 있을 때 선고 못 한 사건을, 민유숙 대법관 퇴임 직후 급하게 선고하며 저 문장을 내놓은 것”이라며 비판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젠더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민 전 대법관은 지난해 봄 “나와 박정화 대법관이 다 나가도 우리 판결을 지켜야 하는데”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대법원의 변화를 예견하고 걱정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이에 변호사들의 반응도 극과 극이다. 피해자를 다수 대리하는 한 중견 변호사는 “가해자 변호인의 주장대로, 대법원 판결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특정 문장을 가져다 쓸 수 있고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죄추정의 법칙에 따라 입증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는 게 훨씬 익숙할 것”(성범죄 전문 변호사)이란 우려도 나온다.

거꾸로 가해자 측을 주로 대리하는 변호사는 “성인지감수성 판결 이후 학계와 하급심에서 6년간 쌓여온 문제의식을 정리해준 것(10년차 변호사)”이라고 환영했다. 발 빠른 변호사들은 벌써 성범죄 피의자 혹은 피고인들에게 천대엽 판결을 세일즈 포인트로 쓰고 있기도 하다.

법조인들은 앞으로 성범죄 법정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하급심이 ‘천대엽 판결’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달려있다고 입을 모은다. 2018년 ‘성인지감수성’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약 6개월간 하급심에서 84건(형사판결문 기준) 대다수가 유죄 취지로 인용되며 당시 ‘성범죄 사건 판결을 바꿨다’는 해석이 나왔었다. ‘천대엽 판결’을 무죄 취지로 인용한 것도 두 달 새 27건으로 엇비슷한 확산세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는 선고로 끝나는 게 아니라 활용되면서 애초에 쓴 방향보다 더 크게 이용될 수 있다”며 “천대엽 판결은 쟁점이 많은 판례고, 앞으로 ‘법 사용자’들이 어떤 판례를 쌓느냐에 따라 다른 결말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형사법 전문가인 천 대법관이 쓴 거라 확산세가 더 강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추후에 두 판결을 다시 한번 짚는 대법원 판결이 새로 나와야 정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 고법 판사는 “당분간 각자 내리고자 하는 결론(유죄 혹은 무죄)에 따라 2018년 판결과 2024년 판결을 각각 끌어다 쓰는 동상이몽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도 내다봤다.

천대엽 판결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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