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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두 달새 25건 "무죄" "무죄" "무죄"…성범죄 판결이 달라진다 [천대엽 판결 후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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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러스트 김지윤.

일러스트 김지윤.

천대엽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이 지난 1월 4일 주심으로 선고한 대법원 판결이 6년 만에 법원의 성범죄 사건 판결 흐름을 바꾸고 있다. 천 대법관이 한 자폐 남성의 성추행 사건을 “장애로 인한 강박·상동행동일 수 있다”며 무죄로 파기하면서 6년 전 박정화 대법관 판결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박 당시 대법관은 2018년 10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이하 ‘성인지감수성’ 판결).

 이번에 천 대법관은 “이는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천대엽 판결’)며 해석을 제한했다. 천대엽 판결이 파장이 큰 건 성범죄 사건 대부분이 CCTV 영상 같은 객관적인 직접 증거는 부족하고 피해자 진술과 정황 증거만 있기 때문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실제 대법원 사법정보시스템에 따르면 5일까지 법원에서 천대엽 판결을 인용한 1·2심 판결이 두 달만에 27건이 나왔고, 전부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가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실을 통해 하급심 판결문을 전부 입수해 분석한 결과 27건 중 25건이 강간·준강간을 포함한 성범죄 사건이었다. 이 중 1심에서 징역 3~6년의 실형을 선고한 성폭행 사건을 2심에서 천대엽 판결을 인용해 무죄로 뒤집은 사건도 5건이 나왔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천대엽 판결’ 인용 1심 징역 3~6년 5건→2심 무죄 뒤집혀

 이 5건의 항소심 무죄 판결은 대부분 천대엽 판결을 인용해 1심에선 인정했던 피해자 진술을 배척하면서 나왔다. 과외 선생님인 A씨가 미성년자인 학생을 3차례 유사성행위 및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1심을 맡은 수원지법은 2022년 2월 “피해자 진술이 신고부터 법정까지 비교적 일관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세부적인 감정 묘사도 믿을 수 있다”며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수원고법은 지난 1월 31일 “추행의 장소‧일시‧대응에 대한 피해자 진술이 달라진 건 나이 등의 한계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며 “피해자가 과외를 받지 않기 위해 과장·허위신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피해 아동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무죄로 뒤집었다.

 대학 지인 사이로 술을 함께 마신 뒤 만취한 피해자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주거침입 및 준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도 1심(징역 5년)과 항소심(무죄) 결론이 달랐다.

 1심 법원은 피해자의 ‘알코올 블랙아웃’(과음 후 기억이 사라진 증세) 주장과 비밀번호를 몰래 알아내 집에 들어왔고(주거침입), 이후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강간했다(준강간)는 진술을 모두 인정했다.

 반면에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지난 1월 “(피해자 주장은) 음주 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추측하거나 재구성한 것”이고 “이전에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해 전부 무죄로 판단했다.

 이외에도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과 법정 진술이 다르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과장하는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한 판결도 많았다. 그 외에 ‘부모님께 들킬까 봐’ ‘낙태 비용 때문에’ ‘성병 옮아 원망에’ 등 거짓말할 만한 이유가 있다며 진술을 배척한 판결문도 많았다.

 1심에서도 피해자의 허위 진술 가능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판결도 나왔다. 창원지법은 지난 1월 25일 골프장 캐디 성추행 사건에서 “피고인들의 골프장 내 평판이 양호했다”며 “피해자가 사실과 다르게 피해를 호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무죄로 봤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박정화 전 대법관의 ‘성인지감수성’ 판례 이후 대폭 사라졌던 성범죄를 당한 이후 ‘피해자다운 행동’ 여부를 문제 삼은 판결문도 곳곳에 나타났다. “피해서 화장실로 갔다가 다시 피고인 곁으로 간 것은 성범죄 직후 피해자의 범행으로 매우 부자연스럽다”거나 “사건 직후 피해자가 다른 사람과 연락한 내용을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 등이다.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과거 이성관계 등 행적을 덧붙여 판단에 반영한 판결도 있었다. 청주지법 충주지원은 지난달 1일 미성년자 여럿이 한 여학생을 여러 차례 성폭행한 혐의(특수강간 등)로 9명이 기소된 사건 1심에서 공소사실 6건 중 한 건(4명)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무죄라고 보면서 “피해자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합의로 성관계한 적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소개팅 앱으로 알게된 사이에서 강간으로 기소된 C씨 사건을 심리한 대구지법 서부지원 역시 지난달 “피해자는 30대의 성인여성으로서 자발적으로 소개팅 앱을 사용하여 능동적 이성교제 행위를 한 것”이라고 했다. 또 “사건 직후 보호관찰소 직원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나중에 신고할 생각을 해봤을 것이라는 법정진술은 피해자의 태도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인용 하급심 ‘무죄’ 27건… 최고 인기 문장은 “무조건 유죄 NO”

‘천대엽 판결’은 총 14페이지 중 4페이지에 걸쳐 법리를 적었는데, 이 중 하급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인용된 부분은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부분이다.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하고,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선 안되지만(…)이는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2018년 도입한 ‘성인지감수성’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한 대목(성범죄 판결 25건 중 21건에서 인용)과, 뒤이어 쓰인 “성범죄 피해자 진술에 대하여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하여 보더라도, 증명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문장도 같이 인용하는 경우도 많았다(성범죄 25건 중 17건에서 인용).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사실 ‘천대엽 판결’ 자체는 피해자 진술을 믿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선 믿는데, 다른 사건에선 못 믿을 때가 있다’는 얘기를 넣은 것이다. 이에 대해 “쟁점과 관련 없는 내용을 판결문에 끼워팔기한 의도적 설시(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란 해석도 있다. ‘천대엽 판결’에서 무죄취지 파기환송의 이유는, 피해자 진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더라도 피고인의 무죄 주장을 배척하기 충분하지 않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비교적 적게 인용됐다(11건). 그 밖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재차 강조하는 “공소사실의 증명책임은 검사에 있고,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로 피고인 주장 인정이 부정된다며 유죄 판결을 선고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부분은 10차례 인용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천 대법관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벼르고 있다가 관련 사건이 올라오니 작심하고 쓴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천대엽 판결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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