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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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외국의 유명도시를 여행해본 일이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들 도시들에 여러 가지 세심한 배려를 해놓은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우리는 어떤가. 자동차들이 보행자를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예사로 일어나고 있다. 자가용 승용차, 택시, 버스, 트럭 할 것 없이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가로막고 버텨 서있는가 하면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도 요리조리 보행자를 피해 질주하고 있다.
뛰다시피 걸어서 횡단하는 보행자들에게 왜 늑장을 부리냐고 짜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동차 탄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보행자의 가슴은 하루종일 멍들게 된다.
그 뿐이랴. 보행자들은 자동차의 요란한 경적으로 깜짝 깜짝 놀라기 일쑤이며 버스가 마구잡이로 달리면서 내뿜는 시꺼먼 연기는 보행자들의 비위를 마구 건드리고 있다.
사람 나고 차 낳지, 차나고 사람 낳나.
삿대질하며 큰소리로 운전자들의 잘못을 타일러도 분이 풀리지 않을텐데, 이건 되레 보행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입 뻥긋 못하니 모순도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사람을 경시하다 보니 89년의 경우 전체교통사고 22만5천62건 중 보행자 관련사고가 7만2백81건으로 31.1%를 차지한 것이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행에 거추장스럽게 지장을 주는 장애물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하도·육교가 시내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빌딩에 자동차가 들락날락하느라 보행자에게 불편을 줄뿐만 아니라 경찰의 눈에 잘 안 띄는 보도 위의 주차는 보편화된 현실이 돼버렸다. 또 도로굴착, 건물공사, 노점상, 표지판 등도 보행에 큰 불편을 주고있다.
서울의 경우 세종호텔 건너편은 보도가 갑자기 끊겼는가 하면, 한남대교 남단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보도는 안 보인다. 이러니 보행자들의 가슴은 이래저래 불 화로처럼 달구어지면서 끓게 된다.
대로건설과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이 자동차 위주의 비인간화된 도시를 탄생시켰고, 보행이나 자전거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이동수단이 스며들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도시는 사람이 편하고 안전하게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살 수 있어야 하며 행정 당국이나 운전자는 이 같은 점을 늘 염두에 둬야하는데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보행자의 권리가 박탈당한 도시라면 자동차 운전자라도보행자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데 한술 더 떠서 보행자를 무시하고 마구 달린다. 특히 보행자가 건너도 좋다는 푸른 등이 켜져 있는 건널목은 보행자의 성역인데도 교통경찰만 없으면 자동차들이 보행자를 칠 듯이 쌩쌩 달린다. 보행자를 존중할 줄 아는 운전매너가 아쉽다.
눈에 보이는 우리네 도시는 걷고, 산책하고, 담소하고, 일하고, 휴식하는 삶의 터전이 아닌 살벌한 자동차물결이 실치는 도시다. 이제부터라도 자동차보다는 사람을 우선 생각하는 교통문화의 뿌리가 내리기를 기대해본다. <원제무(서울시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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