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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어린이집, 이제 할머니가 다닌다…늘어난 '어르신 유치원' [저출산이 뒤바꾼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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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동산노인복지센터’ 앞엔 빨강·파랑 색깔이 선명한 미끄럼틀이 있다.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를 지나면 동화 속 성(城) 같은 복지센터 건물이 나온다. 지난 3일 놀이터 앞에서 만난 정양혜(66·여) 센터장은 “추억의 미끄럼틀”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어린이집에 있던 것인데, 마지막 졸업생이 떠나던 날 ‘추억을 위해 남겨두겠다’고 약속해 지금까지 관리해오고 있다”고 했다.

1997년 문 연 어린이집, 2016년 노인시설 전환

지난 3일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에 위치한 동산노인복지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색의 미끄럼틀이 남아 있다. 이 시설은 2016년 2월까지 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박진호 기자

지난 3일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에 위치한 동산노인복지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색의 미끄럼틀이 남아 있다. 이 시설은 2016년 2월까지 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박진호 기자

동산노인복지센터는 1997년 문을 연 어린이집이었다. 친환경 보육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한때 원생이 110명에 달했다. 산에서 뛰놀고 텃밭을 가꾸는 등 자연 체험 공간이 많아 친환경 보육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자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저출산 현상 속에 마을 젊은이가 줄면서 원생이 급감했다. 2015년에는 신입 원생이 2명까지 줄었다.

결국 정 센터장은 2016년 2월 졸업식을 끝으로 어린이집 간판을 내렸다. 당시 졸업생은 7명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건물 2층엔 어린이집에 다니던 아이들과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정 센터장은 보육원과 노인시설을 놓고 고심하다 그해 9월 노인복지센터를 열었다. ‘오지마을 밑반찬 배달 서비스’로 관련 사업을 시작한 그는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배달했다. 도시락 마련 비용은 정씨가 개인 돈으로 해결했다. 사업 초기 20가구를 대상으로 했던 사업은 춘천시가 보조금을 주면서 지난해 63가구까지 늘었다.

보육원이냐, 노인시설이냐 고심 끝에 노인복지센터 열어

지난 3일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에 위치한 동산노인복지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색의 미끄럼틀이 남아 있다. 이 시설은 2016년 2월까지 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박진호 기자

지난 3일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에 위치한 동산노인복지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색의 미끄럼틀이 남아 있다. 이 시설은 2016년 2월까지 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박진호 기자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그는 도시락 배달을 발판으로 재가노인지원서비스, 노인일자리 사업 등으로 확대했다. 동산면과 동내면·남면·남산면·신동면 등 5개면 노인 545명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마저 쉽지 않았다. 연간 인건비 가운데 80%를 정부가 지원했지만, 나머지 20%를 감당하지 못했다. 또 노인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동차 기름값이나 외부 행사 비용 등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이에 수년간 적자가 쌓였다.

결국 노인복지센터도 인건비를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해 지난 1일부터 휴업에 들어갔다. 정 센터장은 “다른 데서 일해서라도 돈을 벌어 센터를 다시 열고 싶다”며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갖다 줄 수 없게 돼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저출산 현상이 심해지면서 노인 복지시설로 바뀌는 어린이 시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이 전국 17개 시·도에서 받은 ‘장기요양기관 전환 현황’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10년간 전국 어린이집·유치원 188곳이 장기요양기관으로 바뀌었다. 지역별로는 경기 36곳을 비롯해 경남 25곳, 충남 20곳, 광주 17곳, 경북 16곳, 인천 15곳, 강원 11곳, 전남 10, 대전 9곳 등이다.

손자 어린이집이 할머니 다니는 노인센터로

지난 5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 목련주야간보호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라딘 궁전' 모양의 놀이터 구조물이 남아 있다. 1996년 3월부터 2019년 2월 말까지 비둘기동산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안대훈 기자

지난 5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 목련주야간보호센터. 노인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알라딘 궁전' 모양의 놀이터 구조물이 남아 있다. 1996년 3월부터 2019년 2월 말까지 비둘기동산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안대훈 기자

유치원·어린이집이 노인 시설로 바뀌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면서 손주가 다녔던 어린이집을 할아버지·할머니가 다니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지난 5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 ‘목련주야간보호센터’에서 만난 박모(82) 할머니도 그중 한 명이다.

박 할머니는 2019년 10월부터 이 보호센터를 다니고 있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할머니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센터에서 매일 주간보호서비스를 받는다. 2019년 8월 문을 연 이 보호센터는 10여년 전만 해도 박 할머니 손자가 다니던 어린이집이었다. 손자는 현재 고등학생이다. 지금 센터에 다니는 할머니·할아버지 41명 중 9명은 손주가 다녔던 옛 어린이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20년 넘게 ‘비둘기동산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보호센터에는 아직도 어린이집 놀이터가 남아 있다. 손자가 뛰놀던 공간은 이제 박 할머니가 점심 후 걷는 산책길이 됐다. 박 할머니는 손자가 학예회를 하던 대강의실에서 치매 예방을 위한 인지 강화 수업을 듣는다. 손자가 낮잠을 자던 공간은 할머니 수면실로 바뀌었다.

개원 23년 만에 폐원…원생 20명도 못 채워

지난 5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 목련주야간보호센터. 출입문 바로 옆에 어린이집 원생들이 자기의 꿈을 그린 손바닥만한 사각형 타일 41개가 붙어 있다. 2019년 2월 말까지 비둘기동산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안대훈 기자

지난 5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 목련주야간보호센터. 출입문 바로 옆에 어린이집 원생들이 자기의 꿈을 그린 손바닥만한 사각형 타일 41개가 붙어 있다. 2019년 2월 말까지 비둘기동산어린이집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안대훈 기자

‘어르신 유치원’이라 부르는 센터 출입문 옆 벽면에도 어린이집 흔적이 남아 있다. 손바닥만 한 사각형 타일 41개에는 원생 41명 이름과 가수·화가·의사·군인 등 어린이들의 장래 희망 직업 모델이 그려져 있다.

한때 원생이 172명에 달했던 이 어린이집은 저출산 여파를 견뎌내지 못했다. 1996년 3월 개원, 23년 만인 2019년 2월 졸업식을 끝으로 폐원할 때 원생은 20명이 안 됐다고 한다. 원생이 줄어드니 보육교사·조리사·운전기사 등 20명 가까이 되던 직원도 한 자릿수로 줄여야 했다.

김미숙(69·여) 목련주야간보호센터장은 “매월 운영비 적자액이 600만~700만원씩 2~3년 동안 쌓이다 보니 버틸 수가 없었다”며 “결국 평생교육학 박사 전공을 살려 취득한 ‘웰다잉 강사지도사 1급’ 자격증을 토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아우르는 평생 돌봄 서비스를 실천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주 국회의원은 “출생아동이 급감하면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만큼 정부가 유치원 폐업과 노인돌봄시설 수요 등 현황부터 제대로 파악해 장기적인 지원 및 운용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심인선 경남연구원 사회문화연구실 선임연구위원도 “어린이집 등은 거주지와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안전장치도 잘 갖춰져 있어, 다른 시설보다 노인돌봄시설로 전환하기 쉽다”라며 “이런 공간을 폐원 후 상업시설 등으로 바뀌게 두는 것보다 노인돌봄 수요에 맞게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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