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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매릴린 먼로 대형사진 걸었다…유머 넘친 과학자 호킹 [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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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기원 
토마스 헤르토흐 지음
박병철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스티븐 호킹은 1988년 출간한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빅뱅에서 블랙홀까지』로 대중에게 과학계 스타로 각인됐다. 골격근을 통제하는 신경세포가 소멸되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을 21세 때부터 앓은 것도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또 다른 이유다. 이 때문에 휠체어 생활을 하고, 컴퓨터가 지원하는 인공음성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도 드넓고 끝을 모르는 우주의 기원과 변환, 그리고 운명을 계속 탐구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우주의 빅뱅이라는 근원부터 연구했다.

호킹이 일생 동안 제기한 가장 큰 질문은 ‘우주가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데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됐느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이론 물리학과에서 자신의 박사과정 지도학생인 벨기에 출신의 토마스 헤르토흐와 함께 20년 동안 이 문제를 공동 연구했다. 바로 이 책 『시간의 기원』 의 지은이로, 현재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에서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빅뱅을 연구하는 이론물리학 교수다.

2012년 일흔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호킹이 케임브리지의 연구실에서 논문을 검토하는 모습. 벽에 걸린 칠판에는 홀로그램 우주론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계산이 적혀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2012년 일흔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호킹이 케임브리지의 연구실에서 논문을 검토하는 모습. 벽에 걸린 칠판에는 홀로그램 우주론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계산이 적혀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호킹은 자신의 제자이자 동료인 지은이와 함께 생명 출현과 관련한 자신만의 새로운 우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호킹의 마지막 날이 시나브로 다가올 무렵, 두 공동 연구자는 우리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다윈주의적 시각을 담은 혁신적 새 이론을 내놨다. ‘신의 섭리’로 부를 정도로 절대 변치 않는 개념으로 여겨졌던 여러 물리학 법칙이 사실은 변천해온 것은 물론, 입자‧힘은 물론 시간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우주 진화’를 발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혁명적인 개념을 정리했다. 물리학 법칙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이 지배하고 만들어간 우주와 함께 탄생한 뒤 서로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물리학 법칙이 우주를 진화시키고, 다시 우주는 물리학 법칙을 진화시켰다는 설명이다. 우주의 탄생과 질서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송두리째 바꾸는 과감한 이론이다. 지은이는 이 연구는 호킹이 일평생 연구해 남긴 것으로, 궁극의 학문적 유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공동연구에 착수한 직후인 2001년 브뤼셀의 유명한 선술집 '라 모르트 수비테'에서 호킹과 저자 토마스 헤르토흐(사진 맨 오른쪽) 등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공동연구에 착수한 직후인 2001년 브뤼셀의 유명한 선술집 '라 모르트 수비테'에서 호킹과 저자 토마스 헤르토흐(사진 맨 오른쪽) 등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호킹의 인간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지은이는 1998년 호킹이 근무하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DAMTP)의 연구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우주론을 연구하면서 DAMTP의 고급수학과정을 수강하던 지은이는 뜻밖에도 호킹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수학 시험 성적을 좋게 본 호킹이 자신이 지도하에 박사과정을 이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동료를 통해 물어본 뒤 만나자고 한 것이다. 자신의 연구와 관련한 호킹의 인재 욕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책과 논문으로 가득한 호킹의 연구실에는 매릴린 먼로의 대형 사진과 함께 SF드라마 ‘스타트렉’의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의 홀로테크에서 뉴턴‧아인슈타인‧호킹이 포커를 즐기는 상상화가 걸려 있었다. 홀로테크는 홀로그램으로 설치되는 가상의 전망대다.

2006년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를 방문해 ATLAS 입자 탐자기를 견학하는 호킹. 그의 뒤편에 저자 헤르토흐가 서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2006년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를 방문해 ATLAS 입자 탐자기를 견학하는 호킹. 그의 뒤편에 저자 헤르토흐가 서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지은이는 그 뒤 2018년 호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주론을 공동연구했다. 우주는 왜 지금 이런 모습일까를 궁금해했던 과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어떻게 변해왔을까, 어떻게 종말을 맞을 것인가까지 연구 영역을 확대해왔다. 지은이는 호킹과 함께 이 엄청난 주제를 놓고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가 떠난 지금도 이를 진행하고 있다. 과학 연구도 우주론처럼 한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호기심과 면밀한 연구라는 과학자의 품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은이가 실제로 접한 호킹은 장난기와 유머가 넘치는 개구쟁이 과학자였다. 언어의 선택과 사용에서도 개성적인 면모를 보였다. 호킹은 “망원경에 잡힌 우주가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라는 자신의 말에 지은이가 “그건 철학적 문제가 아닌가”라고 대꾸하자 “철학은 이미 죽었다”라며 한 방을 날렸다. 호킹의 위트를 느낄 수 있는 말이다. 놀라울 정도로 결연하고 단호한 카리스마도 함께 드러난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호킹의 연구실에 걸려 있는 칠판. 1980년 개최된 초중력 학회의 기념품으로, 참가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케임브리지대학교 호킹의 연구실에 걸려 있는 칠판. 1980년 개최된 초중력 학회의 기념품으로, 참가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사실 이 말은 호킹의 학문적 업적과 인간성을 둘 다 보여준다. 호킹이 우주를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라고 한 이유는 빅뱅이라는 격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우주가 수십억 년에 걸쳐 생명체의 탄생과 생존에 적합하도록 변천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호킹이 우주를 연구한 계기이며 이론물리학자로서 호킹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호킹의 가장 가까운 공동연구자의 한 명인 지은이의 회상과 증언을 듣다 보면 호킹의 마지막 이론이 무엇이고, 미래에 새롭게 대두될 우주론이 무엇인지도 얼핏 엿볼 수 있다.

저자 헤르토흐와 호킹.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저자 헤르토흐와 호킹.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책의 영문 원제를 보면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를 오마주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의 기원이 생명의 기원과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호킹의 우주론 연구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이기도 하다. 원제 On the Origin of Time: Stephen Hawking's Final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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