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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 호리호리, 1명은 넓적" 이 한마디에 내 22년을 잃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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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최인철·장동익씨 억울한 옥살이

나는 무죄입니다

7901일 만의 귀가. 21년6개월을 갇혔습니다. 어느 양심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억울한 살인 누명, 무자비한 고문. 죽도록 때리길래 당장 ‘살자고’ 하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했을 뿐이지, 21년 넘게 ‘감방에서 살자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출소 뒤에도 살인자라는 시선의 감옥에 갇힙니다. 30년 만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02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인철(왼쪽)씨와 장동익씨. [중앙포토]

202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인철(왼쪽)씨와 장동익씨. [중앙포토]

2013년 6월 24일 새벽 2시 최인철(64)씨가 집으로 향했다. 7901일, 21년 하고도 6개월이 넘는 세월을 견디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광주교도소에서 3시간쯤 달려 다다른 곳은 창원시 용원동. 그의 기억 속 동네는 대파밭과 연립주택이 어지러이 섞인 곳이었다. 7901일 후의 동네엔 고층아파트와 상가가 반듯하고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동틀 무렵 도착한 집에서 아내를 마주하고 마음이 무너졌다. “얼굴빛이 시커멓고 다리도 절더라고요.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린대요. 저 없이 혼자 돈 벌고 자식들 키우느라 골병이 든 거예요. 살인자 가족이라는 눈총도 많이 받았겠고.”

아내와 재회한 순간을 떠올리며 최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곁에 있던 장동익(67)씨가 거들었다. “억울하게 수십 년간 옥살이하고 나왔을 때 그 기분을 어떻게 쉽게 말하겠습니까.”

최씨가 1991년 경찰서에서 고문당했던 상황을 그린 그림. [중앙포토]

최씨가 1991년 경찰서에서 고문당했던 상황을 그린 그림. [중앙포토]

장씨는 교도소에서 가정을 잃었다. 수감 5년째 되던 해, 매번 눈물바람으로 돌아가는 아내에게 그는 “좋은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언제 세상에 나갈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와 30대 초반의 부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내린 결정이었다.

“이혼 서류를 보고 종이가 찢어지도록 눈물을 흘렸네요. 내가 왜 죄 없이 멀쩡한 가족을 잃어야 하는지 분하고 슬펐습니다.”

20대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두 사람은 함께 살인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운명을 뒤바꾼 일이 일어난 건 1991년 11월 8일 오후 3시쯤. 김 양식장 일을 마친 최씨에게 형사들이 찾아와 대뜸 “공무원을 사칭했냐”고 물었다. 최씨는 이틀 전 장씨와 을숙도에 간 일이 생각났다. 부산시 자연보호 명예감시관으로 활동했던 그는 철새도래지에 침입하거나 갈대꽃을 꺾는 이들을 감시했다. 그날 무면허 운전 교육을 하던 남성이 최씨를 공무원이라고 생각하고 “봐달라”며 건넨 3만원을 받은 게 화근이었다. 이날 저녁 장씨도 경찰서에 끌려왔다.

“고문이 시작된 게 1991년 11월 12일입니다. 11월 8일 사하경찰서 유치장에 갔다가, 11일 중부경찰서에서 강도 혐의를 처음 들었어요.”

두 사람은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 등을 출연해 장학재단 ‘등대장학회’를 세웠다. 김종호 기자

두 사람은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 등을 출연해 장학재단 ‘등대장학회’를 세웠다. 김종호 기자

장씨는 연도와 날짜, 장소를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시신경이 위축되는 유전 질환인 레베르 시신경 병증을 앓았다. “처음 경찰에 잡혀간 날부터 모든 걸 머릿속에 수도 없이 새겼거든요. 전 시력이 안 좋아서 쓸 수가 없으니까요.”

공무원 사칭으로 시작된 추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경찰은 이들이 1년 전 엄궁동 강변에서 차에 있던 남녀를 습격해 여성을 성폭행하고 죽인 뒤 사체를 유기했다고 주장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근거는 단 하나. 차 안에 있던 남성이 “한 명은 체격이 크고 얼굴이 넓적하고, 한 명은 체격이 작고 호리호리하다”고 했던 당시 진술이다. ‘인상 진술’이 살인의 증거가 됐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고문이 이를 가능케 했다.

최씨는 훗날 검찰에서 “(형사들이) 옷을 벗기고 수갑을 채웠다. 쇠파이프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거꾸로 매달았다. 이른바 ‘통닭구이’ 수법이었다.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겨자 섞은 물을 부으면서 ‘강도질했지, 여자 죽인 적 있지’라고 소리쳤다”고 진술했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그는 결국 하지 않은 살인을 했다고 인정했다. 장씨가 공범이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했다. 장씨도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최씨는 옥중 생활에 대해 “기억의 조각을 모으며 진실을 밝히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처음 경찰서에 임의동행했던 날, 경찰서 건물 구조, 고문했던 경찰관 이름, 고문 방법 등을 교도관에게 몰래 빌린 볼펜으로 영치금 영수증 조각에 기록했다.

두 사람은 모범수로 2013년 4월과 6월에 각각 출소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은 뒤였다. 열쇠는 번호 키로, 삐삐는 휴대폰으로 바뀌었다. 버스를 타려면 동전이나 토큰이 아닌 카드가 필요하고 병원 진료 후 약은 약국에서 타야 하는 것까지 새로 배워야 했다.

누명을 벗은 건 2021년 2월 4일. 체포된 날로부터 30여 년 지나서였다. 최씨의 옥중 기록과 장씨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수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심을 신청했다. 재판부는 “인권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사과한다”고 했다.

국가는 두 사람에게 각각 18억~19억여원 배상금을 지급했다. 두 사람은 재심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 제안으로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에서 총 5억원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이름은 ‘등대 장학회’. 장씨는 초대 이사장, 최씨는 이사를 맡았다. 최씨는 “출소해 보니 아이들이 학교와 지자체에서 생활보조비를 받아 자랐다는 걸 알았다”며 “범죄 피해자나 그 자녀 등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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