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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는 죽어 '영생의 캐릭터'를 남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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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 인간의 필멸과 캐릭터의 불멸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가상공간의 캐릭터는 영생의 시간을 살아간다. 사진은 게임 ‘파이널판타지’의 캐릭터 모습.

2004년 11월 2일 하영민 육군 중위는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부하에게 모친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은 아들이 군생활을 하는 동안 아들의 캐릭터를 대신 키웠다. 이날 모친은 전화로 그의 캐릭터가 70레벨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70레벨은 당시 '리니지'의 아크 레벨(최고 레벨)이었다.

"주말에 함께 PC방에 가자. 우리 엄마가 키운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어."

그때 운전병의 실수로 차량이 도로 옆으로 떨어지며 전복되었다. 하 소위는 즉사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오늘도 '리니지' 하이네 서버에는 최고 레벨이면서도 채팅과 컨트롤에 서툰, 이상한 다크엘프(사진) 전사 하나가 사냥터를 배회하고 있다. 아이디는 '울프'. 죽은 아들의 유품이라 생각하고 캐릭터를 계속 키우고 있는 고 하영민 중위의 모친이다.

◆ 가상공간의 초현실성과 초국가적 영역

위의 사례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모정(母情)의 감동과 함께 인간에게 가상공간이 차지하는 신화적 의미를 말해준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모든 것은 다 위험하며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무리 즐겁고 떠들썩한 삶도 마지막에는 패배가 있을 뿐이다. 반면 가상공간은 노화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영생의 세계이다. 사용자가 20대에 만들었던 다크엘프 캐릭터는 사용자가 죽은 뒤에도 아름다운 가상공간에서, 여전히 수려하고 활기찬 청년의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가상공간은 인간이 세속 세계에 살면서 신성 세계를 꿈꾸는 신화적 상상력의 결과물임을 위의 대조에서 잘 알 수 있다.

죽지도 늙지도 않는 가상공간의 피조물들은 우주의 섭리를 거부하는 인간적 오만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J R R 톨킨의 말을 빌리면-"조상이 갖고 있던 힘을 잃고 타락하기 이전의 인류"이다. 인간적인 삶의 영광과 인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 인간의 마음이 지닌 선함과 아름다움이 그들의 초현실적인 형상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가상공간에는 인간이 어두운 시대에 살기 이전에 살았다고 상상되는 위대한 종족들이 영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 청순하고 아리따운 엘프 종족, 근엄하고 강직한 오크 종족, 소박하고 친근한 드워프 종족, 귀엽고 깜찍한 노움 종족, 과묵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휴먼 종족, 으스스하면서도 코믹한 언데드 종족, 음울하면서도 색정적인 다크엘프 종족. 이들은 악의 위협에 직면해 헤맬지라도 반드시 길을 찾고, 치욕을 당할지라도 찬란하게 빛나는 자신의 별을 잃지 않으며, 용의 씨가 흩뿌려진 위험한 세상에서도 유머와 기품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 같은 가상공간의 초현실성은 21세기 사회의 시대적 변화와 연관된다. 21세기 초는 국민국가의 장벽이 약화되고 사람들이 더 좋은 교육과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지구적으로 이산(diaspora)하는 시대이다. 기러기 아빠와 외국인 노동자는 오늘날 모든 선진국이 가진 사회 문제이다.

이런 세계화 시대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당면한 문제를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공동의 취향과 가치관이 필요해진다. 이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국적과 인종과 문화권을 초월하는 지구적인 규모의 대중문화가 유포되고 모든 사람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대한 스토리의 세계가 나타난다. 온라인 게임의 가상공간은 이 같은 '초국가적 공공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상공간은 신화적인 영원성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인 순간성을 갖는다. 21세기 초의 게임은 20세기 초 기차의 경험에 비견된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출발해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차는 느슨했던 전근대적 시간 관념을 파괴하고 시간 엄수를 도덕적 가치로 생각하는 근대인의 의식을 형성했다. 현실 국가의 시간을 초월하여 가상공간의 초국가적 시간을 창조한 온라인게임은 전 세계를 자신의 생활 세계로 받아들이고 1초 단위의 정확성으로 그 시간을 운용하는 현대인의 의식을 형성한다.

유학 간 자식과 국제전화를 하면서 수십만원씩 전화 요금을 내는 것은 나이 든 세대에 국한된다. 게임을 하는 젊은 세대는 전 세계의 최신 자료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외국 친구들과 하루 종일 떠들지만 돈은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팀스픽'이나 '벤트릴로' 같은 게임의 음성채팅 프로그램 덕분이다. 게임 세대에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이다.

온라인게임 '길드워'에서 세계 각국의 사용자 8명이 한 부대를 구성하면 가장 지위가 높고 노련한 사람이 음성채팅으로 지휘를 시작한다. "헬로 에브리원. 디스 이즈 몽골리안포스 스피킹. 아 윌 콜 타깃. 플리즈 폴로 마이 콜링.(다들 안녕하세요. 지금 몽골리안포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타깃을 지정할 겁니다. 저의 지휘를 따라주세요.)" 부대가 적군과 조우하면 지휘관은 구령을 붙인다. "타깃 이즈 에너미 넘버 식스. 나우 카운팅. 스리, 투, 원. 킬.(타깃은 적군 6번입니다. 자 카운트합니다. 셋, 둘, 하나, 죽이세요.)"

각기 다른 적을 견제하던 8명은 킬이라는 신호와 함께 타깃을 향해 가장 빠르고 강력한 스킬 하나를 퍼붓는다. 적군의 치유와 보호.견제를 감안하면 1초 안에 치사량의 1.5배 정도 대미지가 들어가야 타깃을 죽일 수 있다.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사는,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언어도 다른 8명이 정확하게 그 1초를 맞춘다. 가상공간이 얼마나 무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인지를 말해주는 실례이다.

글=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소설가>
취재 및 연구보조=신새미.임하나

*** 바로잡습니다

지난주 이 지면에 인용된 고 하영민 소위의 죽음은 군 작전 중의 사고로 인한 명예로운 순직이었습니다. 계급 역시 소위가 아닌 중위로 바로 잡습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점 유족과 친지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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