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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금융·통화정책의 뼈아픈 실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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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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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릅니다. 물가는 2%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겁니다. 경제 체력이 예전과 다릅니다. 별일도 아닌데, 위기라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 요새 쑥 들어갔네요.”

올봄에 만난 한 고위 관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내심 그는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대로’를 그렸을 것이다. 섣부른 낙관이었다.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6%.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모면했다. 중동 사태까지 겹쳐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8%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게 비싸졌다.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다. 물가 불안과 저성장이 누적되면서 체감 경기는 하반기에 더 나빠졌다.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 우려도 커진다.

집값·가계대출 겨우 잡히던 차에
정부 주도로 대출 완화…투기 불러
금리 동결도 시장에 잘못된 신호
물가안정 우선, 돈 풀면 위기 올 것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은 뼈아픈 실책을 불렀다. 올 초 집값 급락을 막겠다며 정책자금인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을 풀었다. 이 조치는 ‘부동산은 지금이 바닥’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내 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젊은이들이 빚을 내 집을 샀다. 소득 제한을 두지 않는 바람에 부유층도 이 대출을 받았다. 고금리 경기침체 시기에 부동산 투기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주도로.

대출 규제를 푸니 쾌재를 부른 건 은행이다. ‘이자 장사’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은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았다. 가계대출은 4월 이후 매달 2조~7조원씩 늘었다. 9월 말 가계대출은 1877조원, 기업 대출 1238조 원, 정부부채 1100조원을 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4000조원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행이 느슨해진 대출을 걱정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은은 서민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대출이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투자는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대출을 풀어 놓고 이제 와서 위험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굳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한은 통화정책도 ‘돈을 더 조이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한은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로 올린 뒤 10개월째 동결했다. 그사이 미국은 기준금리를 4.5%에서 5.5%로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2%포인트나 높다. 정상은 아니다. 과거에는 한·미 금리 차가 1%포인트만 나도 걱정이 컸다.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원화 환율이 오르고 물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이 무뎌졌다. 다른 경제 관료의 말. “한국 경제가 커져서 미국과 2%포인트 금리 차에도 별 영향 없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한·미 금리 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안심해도 될까. 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는 바람에 한·미 금리 차가 역전된 기간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 번 있었다. 그때마다 큰일이 터졌다. 김대중 정부 1999~2001년(1.5%포인트 차)의 과잉 유동성 후유증으로 닷컴 버블과 카드 대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 2005~2007년(1%포인트 차)과 문재인 정부 2018~2020년(0.75%포인트 차)에는 부동산이 치솟았다. 그 여파로 노·문 두 정부는 대선에서 지고 정권을 잃었다.

“7%대 금리 시대에 대비하라”(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고금리 기조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긴축을 이어가면 우리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애써 외면하면 시장금리는 따로 움직인다. 이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중 최고 수준인 4%대에 진입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괴리가 커질수록 통화정책에 불신이 쌓인다. 세수 부족과 적자 누적으로 재정정책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화정책마저 고장 나면 정부가 쓸 카드가 없다. 총선을 앞두고 ‘공매도 금지’ 같은 무리한 단발성 대책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이 총재가 좀 더 강단 있게 처신했으면 한다. 예전 한은 총재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이 총재도 언제부턴가 발언의 무게감이 떨어진다. 지난달 “가계 부채가 안 잡히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그가 뭐라 말하든 결국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집값도 더 떨어져야 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한다. 미국 연준(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올해 정부와 한은이 정상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폈으면 집값이 뛰고,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돈줄 조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돈을 풀면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김대기 실장 말처럼 외환위기의 몇십 배 큰 위기가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