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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아는 만큼 보이는 생명의 세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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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호 22면

자연에 이름 붙이기

자연에 이름 붙이기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윌북

계(界·Kingdom)-문(門·Phylum)-강(綱·Class)-목(目·Order)-과(科·Family)-속(屬·Genus)-종(種·Species). 18세기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린네)가 제시한 생물 분류체계다. 오늘날의 과학자들도 여전히 사용하는 린네식 생명 계층구조를 학창 시절 달달 외웠던 기억들이 있을 거다. 인류는 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영장목-사람과-사람속-사피엔스종이다. 생명의 세계 전체를 체계화해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린나이우스는 인류 종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명명했다. 호모(Homo)는 속명, 사피엔스(sapiens)는 종 이름이다. 학명 또는 라틴어 이명(二名)으로 불리는 이 명명법이 확립된 덕분에 전 세계인들은 각종 식물이나 동물의 이름을 통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동물과 식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이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까.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른바 ‘분류학’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자연에 이름 붙이기』(원제 Naming Nature)는 바로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과 분류학의 역사에 관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흥미진진하게 담은 책이다.

일본 도쿄 긴자 아트 아쿠아리움 미술관의 금붕어와 관람객. 책에 따르면, 분기학자들은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EPA=연합뉴스]

일본 도쿄 긴자 아트 아쿠아리움 미술관의 금붕어와 관람객. 책에 따르면, 분기학자들은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EPA=연합뉴스]

일본계 어머니를 둔 한국계 미국인인 지은이 캐럴 계숙 윤은 오랫동안 뉴욕타임스에 글을 연재한 과학 칼럼니스트이자 진화생물학자다. 2009년 영어본으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룰루 밀러의 과학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큰 영감을 미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러는 “이보다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다”고 고백한다.

지은이는 어려운 과학 이야기, 분류학 이야기를 과학적 언어가 아닌 문학적 언어로 생동감 있게 풀어나간다. 과학이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표현들이 현란하고 귀에 속속 들어온다. 소설이나 시, 아니면 동화를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린나이우스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0년 넘는 분류학사의 발전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스토리들을 곁들였다. 직관적으로 종을 알아내는 천재여서 ‘작은 신탁 신관’이라고 불리었던 린나이우스 때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생물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영국 군함 비글함의 박물학자로 갈라파고스와 전 세계를 5년간 여행하고 돌아와 따개비 연구를 통해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개념을 설파한 다윈 이후 다른 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분류학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분류학은 이후 진화의 개념을 강조하는 진화분류학,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라는 새 기법에 기반한 수리분류학, 화학의 힘을 이용해 진화의 깊은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분자분류학으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각 학파는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지금도 그렇다.

마침내 ‘물고기는 없다’라고까지 주장하는 분기학(分岐學·Cladistics)이 등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어류는 ‘진짜 분류군’이 아니다. ‘어류’라는 하나의 분류군을 만들고 싶다면 물고기는 물론이고 물속 동물에서 진화한 육상 동물 소나 포유동물, 심지어 인간까지 모두 넣어야 한다는 논리다. 공룡에서 진화한 새들도 공룡이라고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지금은 분류학이 전문 과학자들의 영역으로 그들만의 단독 소유물이 돼 버렸지만, 지은이 캐럴 계숙 윤은 생명의 세계 및 그 세계의 질서에 대한 지각이란 의미를 담은 움벨트(Umwelt)라는 독일어의 개념을 매우 중시한다. 어린이들이 공룡의 이름과 종류를 외우는 공룡 시기, 일본의 닌텐도가 만들어 낸 유사생물인 포켓몬의 이름을 외우는 포켓몬 시기 등에서 보듯이 인류는 움벨트 비전과 분류 능력을 본능적으로 타고난 종이다.

실제로 인간의 뇌 특정 부위에는 생물에 대한 관심사와 이를 분류하는 능력이 장착돼 있음이 증명되기도 했다. 특히 원시 인류에게 분류 능력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이 식물 또는 이 동물이 무엇인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알아내는 능력이 생존에 중요했기 때문이다. 생물 명명력 결핍증이 있는 후손들은 움벨트 비전이 강한 성향이 있는 후손들보다 번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작았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말마따나 분류학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분류학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어 인간과 생명 세계, 진화와 과학 사이의 아주 오래된 관계를 때로는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든 문제작이다. 분류학상 물고기류의 존재 문제는 과학자들에겐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겐 그보다는 움벨트 비전을 갖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움벨트의 소중함을 스스로 각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뿌듯해한다. 이 책은 우리들의 사라져 가는 움벨트를 회복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주변의 식물과 동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 각자의 이름을 알면 아는 만큼 보이는 세계가 더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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