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테랑도 세번 지고 네번째 됐다…당신도 한번 더 해보라”-김대중 육성 회고록〈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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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20〉

1996년 5월 서울시청 앞에서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와 함께 신한국당이 의원 영입을 통해 인위적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려는 것을 규탄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한광옥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 DJ, JP,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6년 5월 서울시청 앞에서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와 함께 신한국당이 의원 영입을 통해 인위적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려는 것을 규탄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한광옥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 DJ, JP,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2년 14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나, 김대중(DJ)은 정치 일선에 비켜나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야인’이었지만 민주당 내에 나를 따르는 ‘DJ사단’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를 견제하려는  이기택 민주당 대표와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잠복했던 갈등은 95년 6·27 전국 동시 지방선거 때 터지고 말았다.

6·27 지방선거는 35년 만에 단체장을 직접 뽑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미스터 지방자치’로 불렸다. 20년 동안 줄기차게 지방자치제 도입을 외쳤고, 90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이를 쟁취했다.

나는 조순 전 부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이종찬 전 정무1장관을 경기도지사 후보로 이기택 대표에게 추천했다. 서울과 경기 수도권에서 석권해야 지방선거에서 완승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후보를 두고 이 대표와 충돌했다. 이 총재는 장경우 의원을 고집했다. 이 총재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간곡히 부탁했다.

“경기도지사 후보를 이종찬 전 장관으로 양보해 주시면 큰 은덕을 입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하면 이 대표의 차기 당권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이 대표는 “의견을 존중해서 결정하겠다”고 답하고 돌아갔다. 얼마 뒤 “만약 장경우가 떨어지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독선에 실망했다.

JP “사랑이 없는 권력은 폭력”

1995년 4월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조순 전 부총리 의 서울시장 후보 영입과 관련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5년 4월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조순 전 부총리 의 서울시장 후보 영입과 관련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여당 상황도 비슷했다. 김영삼(YS) 대통령과 김종필(JP) 민자당 대표 간 갈등이 표출했다.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으로 불리던 JP는 홀대와 수모를 당하다 끝내 버티지 못했다.

JP는 3당 합당 5년 만인 95년 2월 YS와 결별했다. JP는 5·16 군사정변, 3당 합당에 이어 “35년 정치 역정 중 가장 어려운 결심”이라며 민자당을 떠났다. JP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사랑이 없는 권력은 폭력”이라며 “독선·독단과 충격에 의한 정치 행태는 버려야 한다”고 YS의 통치 스타일에 강한 반감을 표했다. JP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내각제 개헌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나는 ‘지역등권론’을 주창하며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지원 유세에 나섰다. 집권 세력을 탄생시킨 특정 지역이 다른 지역에 군림하는 지역패권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지방자치 시대에는 각 지역이 대등한 권리를 갖는 지역등권주의로 나가자고 역설했다. 전국의 유세장에서 DJ 바람을 일으켰다.

선거 결과는 야당의 대승이었다. 민자당 참패, 민주당 선전, 자민련 돌풍으로 요약됐다. 15개 시·도지사 선거에서 민자당이 승리한 곳은 다섯 곳에 그쳤다. 서울 구청장의 경우, 25곳 중 민자당은 단 두 명만 당선됐고 나머지는 23곳은 우리 민주당이 휩쓸었다.

내 우려대로 경기도에서는 패했다. 지면 책임진다던 이기택 대표는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세대교체론”을 언급하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와 JP의 정치적 입지를 깎아내리려는 이상한 행보였다. 이기택 중심의 민주당으로는 여당에 대항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대선 이기려면 충청 표 가져와야

이회창 전 총리가 1997년 7월 신한국당 15대 대선 후보에 선출된 직후 김영삼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회창 전 총리가 1997년 7월 신한국당 15대 대선 후보에 선출된 직후 김영삼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방선거 승리는 나에 대한 민심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지인 한 분이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도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당선됐다. 당신도 한 번 더 해보라.” 용기가 났다. 나는 세 번 떨어졌지만 공정한 선거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정계 복귀를 결심했다. 평생 품었던 내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민주주의 국가 완성과 민족 통일이 그것이다. 대통령이 돼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7월 18일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한다”고 선언하고 정치 현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반 만이다. 신당 ‘새정치국민회의’를 출범시켰다. 이기택의 민주당은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분들이 대거 나의 신당에 참여했다.

97년 대선의 해가 밝았다. 나는 정대철 후보를 누르고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에, JP도 자민련 후보에 각각 선출됐다. 민자당에서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에선 이회창 전 총리가 후보로 뽑혔으나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국민신당을 창당하며 대선에 나섰다.

나의 대선 승리를 위해선 외부 지원이 절실했다. 국회의원 40명대의 원내 제3당인 자민련은 독자적으로 힘이 없었다. 자민련 총재 JP는 민자당 탈당 이후 YS와 관계가 나빠지면서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와 손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 당 한광옥 부총재와 자민련 김용환 부총재가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막후 협상에 착수했다.

일부에서 정체성을 문제 삼았다. 자민련의 뿌리를 쭉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다. 나는 색깔론 타파와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자민련과의 연합이 불가피하다고 설득했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충청도 표를 가져와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정치에선 소신과 명분 못지않게 현실적 선택도 중요하다. ‘야합’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정권 교체였다.

DJP “여생을 함께 국가에 봉사”

10월 27일 밤 JP의 청구동 자택을 직접 방문했다. 나와 JP는 ‘공동정권 구성과 운영’에 합의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고, 집권 시 공동정부에 참여하는 각료는 양당이 동등하게 맡고, 실질적인 각료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는 실세 총리는 자민련 측에서 맡도록 한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탄생했다. ‘양당은 집권 시 99년 12월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고 명시했다. 우리 둘은 “여생을 함께 국가와 민족에 봉사한다”고 다짐했다.

(※JP는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서 DJ-JP 후보 단일화 회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97년 10월 27일 밤 8시 30분. 김대중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김 총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김 총재님(JP),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DJ를 소파에 앉도록 권하며 ‘그러잖아도 도와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총재님(DJ)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寃)과 한(恨)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의 답을 들은 DJ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TJ “집권하면 호남 사람이 다 해먹나?”

박태준(TJ) 의원의 합류는 큰 힘이 됐다. 포항제철 신화를 만든 그를 97년 9월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전이 벌어진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만났다. 대한민국이 일본에 2대1로 역전승했다. 경제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함께 양심이 투철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다음 날 조찬을 같이 했다. TJ가 물었다.

“만일 집권하시면 호남 사람들이 다 해먹을 것이라는데, 사실입니까? 또 총재님의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나는 솔직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서로를 믿게 됐다. 자민련 총재가 된 TJ는 나를 지원했다. DJP 연합을 확장한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이 완성됐다.

마지막 도전 배수진

김대중 육성 회고록 QR코드

김대중 육성 회고록 QR코드

DJP·DJT 연합에 역사적 의미를 두고 싶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낡은 정치 관행을 깼다. 과거에 적이라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남북 평화, 지역주의 타파에 뜻이 같다면 함께 정치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DJP·DJT 연합은 원칙을 지키면서 유연한 사고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민주화 경력(DJ)-국정 경험(JP)-경제 경륜(TJ) 결합이 국민에게 신뢰를 줬다. 선거 때마다 색깔론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보수층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나의 대선 레이스에 순풍이 불었다. 생애 네 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5066)

21회 〈3전 4기 대통령〉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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