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4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나, 김대중(DJ)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정치 일선에 비켜나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야인’이었지만 민주당 내에 나를 따르는 ‘DJ사단’은 여전히 건재했고, 민주당이 야당으로 제 역할을 하길 성원했다. 그러나 이기택 민주당 총재는 나의 뜻을 선의로 받아주지 않았고, 내 사람을 내치려 했다. 야당으로서의 제 역할을 노력하기보다 나와 주변을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잠복해 있던 미묘한 갈등은 95년 6·27 전국 동시 지방선거 때 터지고 말았다.
6·27 지방선거는 35년 만에 단체장을 직접 뽑는 역사적이면서 상징적 의미가 컸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미스터 지자제’로 불렸다.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해 20여 년 넘게 노력했고, 90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쟁취했다. 지방자치가 정착하도록 앞장서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