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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장 사표 내고 창업한 격…"어려워야 신난다"는 지휘자

중앙일보

입력

노르웨이 트론헤임에서 6년째 상임 지휘자로 있는 지휘자 장한나. "하고 싶었던 거의 모든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노르웨이 트론헤임에서 6년째 상임 지휘자로 있는 지휘자 장한나. "하고 싶었던 거의 모든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녕하세요’의 ‘안’을 길게 늘이는 장한나식 인사법은 여전히 씩씩했다. 사람을 뚫어보는 듯한 눈빛도 우리가 아는 ‘천재 소녀’ 그대로였다. 18일 인터뷰 장소에 온 그가 말했다. “디토 오케스트라와 공연 5번에 앞서서 6일 동안 5시간씩 연습했어요. 아주 뜨거워요!” 목소리만 조금 쉬어있는, 쾌활한 지휘자 장한나다.

지휘자 장한나 인터뷰 #신동 첼리스트에서 뜨거운 지휘자로 #“편하게 살았으면 불행했을 것”

오케스트라와 하는 연습이 일종의 마라톤이라고 했다. “엿새 동안 어떻게 연습할지 두 달 전에 계획해요. 체력 관리를 하다가 경기 날짜 다가오면 단백질 잔뜩 먹고, 트레이닝 방법 바꾸고 그러잖아요?.” 목이 쉰 건 연주가 임박해 결승점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첼리스트 장한나 또한 뜨거웠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온 11세 장한나는 프랑스 파리의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성인들과 겨뤄 이겼다. 그 후 일류 오케스트라ㆍ지휘자ㆍ콘서트홀을 섭렵하며 연주했다. 음악의 한순간도 흘려보내지 않고 모든 음표를 되살려내듯 짚어내는 첼리스트였던 그는 첼로로 연주할 곡이 너무 적다며 2007년 지휘자의 삶을 시작했다. 지휘자 16년, 첼리스트 데뷔는 내년 30년이다.

그가 첼로 연주만 계속했다면 삶은 한결 평안했을 터다. 장한나는 안정된 직장에 사표 던지듯 첼로를 내려놓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첼리스트 장한나를 사랑했던 청중에게 지휘자로서 실력을 새롭게 인정받아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편하고 쉬웠을 것 같아요. 여가 시간도 많아지고.” 지휘 대신 첼로에 주력했다면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했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그게 10대 때부터 일상이었어요. 계속하고 있다면 지금도 그렇겠죠. 어떤 작품을 하고 있을까. 협주곡들,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 다섯 개, 브람스 두 개….” 잠시 생각하던 그가 손을 저었다. “상상이 안 되네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았겠네요.”

어린 시절의 장한나. 지금의 그는 “언젠가 연습할 시간이 나고 내가 원하는 수준이 된다면 다시 첼로를 연주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어린 시절의 장한나. 지금의 그는 “언젠가 연습할 시간이 나고 내가 원하는 수준이 된다면 다시 첼로를 연주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쉽게 살고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지휘자로서 시간이 늘 부족한데 정말 행복하다”는 말도 했다. 장한나는 물리적으로 긴 시간을 쏟아붓는 지휘자다. 우선 악보를 세심하게 공부한다. “악보를 보면 처음에는 이 속도도, 다른 속도도 맞는 것 같죠.” 그다음에는 생각하는 긴 시간이다. “악보 없이도 머릿속에서 그 음악을 종일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 가능한 속도의 범위가 줄어들고 줄어들다가, 마지막에는 이 템포여야 한다는 확신이 와요.” 지휘자가 결정할 일이 속도뿐 아니라는 점에서, 장한나가 공부에 들이는 시간은 길다.

다가오는 연주와, 그 너머의 공연까지 동시에 준비한다. 9월 한국 공연이 끝나면 싱가포르다. 바그너  ‘지그프리트 목가’, 모차르트 ‘주피터’ 교향곡,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다. 그다음에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릴리 불랑제의 미사를 무대에 올린다. “짐 가방을 7주 치 가지고 왔는데 그중에 악보가 12종이에요. 오케스트라 전체 악기가 있는 악보라 너무 무거워서 각 가방에 나눠서 넣어요.” 어떤 악보는 들여다보면서, 또 다른 음악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하면서 익히고, 자기 해석을 만든다.

그는 여름 음악 축제에 출연하지 않는 지휘자다. “매년 여름 한 달은 꼭 쉬었어요. 다른 지휘자들은 여름 페스티벌에서도 연주하는데 저는 절대 안 갔죠. 그때 작품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 장한나의 여름 패턴은 이렇다. 아침 먹고 4시간, 점심 후 4시간, 저녁 후 2~3시간 공부. 그렇게 한 달 15~20개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고도 한 달이 얼마나 짧은지! 그리고 얼마나 재밌고 좋은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3ㆍ24일 연주한 장한나와 디토 오케스트라. 사진 크레디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3ㆍ24일 연주한 장한나와 디토 오케스트라. 사진 크레디아

“최소 500개 오케스트라 곡을 머리에 넣겠다”는 선언은 16년 만에 지켰다. 그는 지휘를 시작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 2013년부터 1년 동안 카타르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있다. “오케스트라 작품에 너무 갈증이 났었죠. 그런데 16년 동안 하고 싶었던 곡들 다 했어요. 특히 트론헤임에서 한 시즌에 말러 교향곡을 두 곡씩 했는데, 트론헤임이 20년 만에 하는 말러였어요.” 베토벤ㆍ말러ㆍ브루크너ㆍ라흐마니노프ㆍ프로코피예프까지 지휘자 장한나가 다루는 폭은 이제 오케스트라 장르 전체를 아우른다. “아주 욕심스럽게 공연을 짰어요. 트론헤임 단원들이 제가 있을 때 바짝 긴장해 힘들다가, 제가 다른 도시에 가면 ‘이제 좀 쉬자’ 한다는 말이 있어요.”(웃음)

쉽게 살게 될까 두려워하는 이 지휘자는 어려움 끝에서야 기쁨을 느낀다. “한국에서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은 모든 부분이 제 머릿속에서 아주 선명해요. 그게 정말 기뻐요. 악보를 몇 시간 들여다보면 나도 모르게 막 웃고 있어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디토 오케스트라와 함께 선 장한나는 5번 교향곡의 속도를 한껏 올려 잡았다. 유명한 첫 소절의 마지막 음을 길게 늘여 연주할 수도 있지만 장한나는 쉴 틈 없이 다음 음표, 그 다음 마디로 넘어갔다. 악단 내의 연주자 숫자는 최대로 늘려 소리의 몸집을 키웠다. 지휘자와 단원에게 어렵고 청중에게는 강렬한 스타일. 장한나의 방식이다. “악보를 한참 공부하고 제 해석을 찾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 이거지! 사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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