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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서, 전부 외워서 '봄의 제전' 연주한 이 오케스트라

중앙일보

입력

이달 초 런던의 프롬스 축제에서 공연한 오로라 오케스트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을 단원 전원이 외워서 40분동안 연주했다. [사진 Andy Paradise/BBC 프롬스]

이달 초 런던의 프롬스 축제에서 공연한 오로라 오케스트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을 단원 전원이 외워서 40분동안 연주했다. [사진 Andy Paradise/BBC 프롬스]

오케스트라 연주였지만 무대 위 의자는 몇 개 뿐이었다. 첼로, 더블베이스, 튜바 같은 악기 연주자들을 빼고는 서서 연주하기 때문이다. 또 악보를 놓는 보면대가 없었다. 모든 연주자가 악보를 외웠으므로. 연주곡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이었다.

전세계에서 주목 받는 신개념 오케스트라들 #모두가 지휘자처럼 외워서 연주 오로라 오케스트라 #"처음부터 주류의 바깥" 스피라 미라빌스 #명문 오케스트라 위주의 지형에 균열 내는 단체들

이달 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음악축제, BBC 프롬스 중 한 공연이었다. 주최측인 BBC는 공연 후 실황 녹음을 들어볼 수 있도록 온라인에 올렸는데, 여기에서 진행자는 “아마도 올해 프롬스의 하이라이트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올해 프롬스 축제에는 런던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와 지휘자 사이먼 래틀, 안드리스 넬손스 등이 참여했다. 쟁쟁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관심을 끈 무대가 이날의 ‘봄의 제전’ 공연이었다.

주인공은 오로라(Aurora) 오케스트라. 이들의 ‘봄의 제전’은 혁신적이었다. 무엇보다 복잡한 음악을 모두가 외워서 연주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봄의 제전’은 첫 10마디 동안 박자표가 7번 바뀐다. 또 예측할 수 없는 리듬, 기교와 같은 전개를 모든 연주자가 다른 악기의 악보까지 머리에 넣고 연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로라 오케스트라는 2005년 창단했는데, ‘악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연주하는 세계 최초의 오케스트라’라는 타이틀을 쓴다. 베토벤·브람스·쇼스타코비치 등 15개 이상의 곡을 외워서 100회 이상 공연했다. 이번 프롬스 연주를 들어보면 오로라 오케스트라의 ‘봄의 제전’은 이음새가 맞아 떨어져 정교하고, 또한 모든 단원이 모든 음표에 달려들어 연주하는 듯 치열하다.

프랑스의 수평적 오케스트라 '르 디소넝스'. [사진 Benoit Linero/르 디소넝스]

프랑스의 수평적 오케스트라 '르 디소넝스'. [사진 Benoit Linero/르 디소넝스]

신개념 오케스트라들이 세계 오케스트라의 지형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부 또는 막대한 재정의 후원자들에 의해 굴러가는 이른바 명문 오케스트라 구도에 부는 신선한 바람이다. 빈필, 베를린필처럼 100년 넘은 오케스트라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신개념 오케스트라들이 한다. 이번 런던 프롬스 축제에서 오로라 오케스트라의 전날 공연은 치네케!(Chineke!) 오케스트라였다. 모든 단원이 아프리카계이고, 같은 인종 작곡가의 음악을 발굴해 연주한다. 치네케! 오케스트라에 대해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너무나 필요한 아이디어이면서 너무나 당연한 아이디어다. 영국의 클래식 음악을 깊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평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유럽 곳곳에서 만발했다.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중심으로 모인다. 이탈리아에 근거하는 오케스트라 스피라 미라빌리스(Spira Mirabilis)는 지휘자가 없으며 ‘음악 연구 단체’라는 정체성을 내걸었다. 프랑스의 르 디소넝스(Les Dissonances)는 ‘집단 필하모닉’이라 스스로 규정하며 지휘자 없이 베토벤ㆍ드뷔시ㆍ라벨ㆍ브루크너를 연주한다. 오로라를 비롯한 이들 오케스트라는 창단 10~20년이 됐으며, 최근 들어 주요 무대에서 초청 받고 있다. 한국의 피아니스트 손열음, 플루티스트 조성현 등이 지난해 창단한 ‘고잉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도 이 흐름 중의 하나다.

지휘자가 없어도 잘 연주할 수 있다는 정도의 뜻은 아니다. 스피라 미라빌리스는 홈페이지에서 “단지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라는 것은 오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첫 리허설에서 모든 단원이 악보 전체를 공부하고, 음악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서 온다.” 쉽게 말하면 조직의 모두가 일이 돌아가는 전체 상황을 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북부에 근거지를 둔 스피라 미라빌리스. [사진 홈페이지]

이탈리아 북부에 근거지를 둔 스피라 미라빌리스. [사진 홈페이지]

기존의 오케스트라에서 단원들은 본인의 악기를 위한 악보만 봤다. 전체 악보는 지휘자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오케스트라에서는 모든 연주자가 전체 악보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다. 오로라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는 지휘자가 있지만, 악보를 외워야 하므로 모두가 전체 작품에 대해 지휘자만큼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바순 수석 연주자인 에이미 하먼은 BBC와 인터뷰에서 “악보를 보고 연습할 때는 ‘봄의 제전’을 한 번도 완벽하게 연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보가 없을 때는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절대적인 정확성을 기했다”고 말했다.

이달 1일 프롬스 축제 무대에 선 치네케! 오케스트라. 연주자 전원이 아프리카계다. [사진 Mark Allen/BBC 프롬스]

이달 1일 프롬스 축제 무대에 선 치네케! 오케스트라. 연주자 전원이 아프리카계다. [사진 Mark Allen/BBC 프롬스]

핵심은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운영 체계다. 스피라 미라빌리스는 연습 방법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각자 음악적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활발한 토론과 논쟁은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며칠 동안 즐겁게 계속된다. 매우 느린 과정이다.” 르 디소넝스 또한 “우리의 바탕은 투명성, 신뢰, 상호 경청”이라고 밝힌다. “개인이 연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며, 각자 집중하고 서로 경청하는 에너지를 청중에게 선보인다”고 덧붙였다.

연주자가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일은 예전에도 물론 있었다.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1959년), 존 엘리엇 가디너의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1989년)가 그 예다. 하지만 이들이 소규모의 편성, 혹은 옛 악기를 위한 연주로 시작했다면 최근의 신개념 오케스트라들은 베토벤 뿐 아니라 스트라빈스키, 브루크너까지 거대한 작품도 용감하게 연주하고 있다. 한 명의 스타 지휘자나 리더를 앞세우지 않고 시스템 변화 자체를 내거는 것 또한 다르다.

'봄의 제전' 연주에 앞서 곡에 대한 해설을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오로라 오케스트라. [사진 Andy Paradise/BBC 프롬스]

'봄의 제전' 연주에 앞서 곡에 대한 해설을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오로라 오케스트라. [사진 Andy Paradise/BBC 프롬스]

플랫폼과 형식도 달라졌다. 르 디소넝스는 매달 한 번씩 지역의 교회에서 노숙자를 위한 공연을 연다. 스피라 미라빌리스는 길거리와 시장에서도 연주하며 “우리는 처음부터 주류 음악계 밖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오로라 오케스트라는 ‘봄의 제전’ 연주에 앞서 한 시간 동안 배우 두 명과 함께 연극을 공연했다.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한 과정, 또 1913년 초연 현장에서 이 작품의 전위성 때문에 일어났던 격렬한 야유와 소동까지 담아낸 드라마였다. 영국의 가디언은 이들의 연주에 대해 “무대에서 아이디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며 “새로운 통찰력으로 무장한 관객 또한 적극적 청중으로서 홀을 가득 메웠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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