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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궁차오 숙부 “붓 희롱할 줄 알아야” 조카 엄하게 교육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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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1〉

소년 시절 친부와 함께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소년 시절 친부와 함께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1981년 10월 중순, 타이베이의 룽민총의원(榮總) 응급실에 80 언저리의 육중하고 초라한 노인이 가슴을 움켜쥐고 나타났다. 숨 헐떡이며 원장을 연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당해하는 간호사를 발견한 응급실 책임자가 다가왔다. 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급조치 지시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병원장이 내려왔다. 노인을 직접 입원실까지 모시고 갔다.

노인은 다른 환자와 달랐다. 병실이 유난히 처량했다. 돌보는 사람이 없고 문안객도 없었다. 정신이 들면 왕방울 같은 눈이 창 쪽을 향했다. 탁한 숨 내쉬며 한동안 뭐라고 웅얼거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관찰력과 호기심을 겸비한 견습간호사가 있었다. 회진하는 의사 따라 왔다가 환자 기록카드도 없고 병실 문에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노인의 병실을 찾았다. 문 여닫을 때마다 입술 움직이면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반복을 거듭하자 해독에 성공했다. 항상 같은 내용이었다. “미국에 있는 내 아내와 두 딸이 보고 싶다. 결혼한 지 50년이 흘렀다.” 말 같지 않은 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정성껏 돌봤다.

대륙에 있는 제자들도 별처럼 화려

부총통 천청(陳誠·앞줄 가운데)과 함께 중앙연구원을 방문한 외교부장 예궁차오(둘째 줄 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부총통 천청(陳誠·앞줄 가운데)과 함께 중앙연구원을 방문한 외교부장 예궁차오(둘째 줄 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1월 20일 오후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적하던 병실 주변이 북적거렸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기자로 보이는 외국인들도 수첩 들고 분주히 오갔다. 이튿날 조간을 본 간호사는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 사망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예궁차오라는 사람의 중년 시절 모습을 한눈에 알아봤다. 신문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의 비극적인 최후를 목도했다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주말에 남자친구 바람 놓고 도서관으로 갔다. 인명사전 놓고 옛날 신문을 뒤졌다. 다재다능(多才多能)과 박학다식(博學多識)의 상징인 노인의 본색에 혀를 내둘렀다. 시인, 학자, 예술가, 외교관, 그것도 앞에 큰 대(大)자가 붙을 정도였다. 전직이 베이징대학과 서남연합대학 교수, 외교부장, 주미대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에 이르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륙에 있는 제자들도 밤하늘의 별처럼 화려했다. 문화곤륜(文化崑崙) 첸중수(錢鐘書·전종서), 동방학의 대가 지셴린(季羨林·계선림), 만인의 베개 폭을 적신 서정시인 볜즈린(卞之琳·변지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桭寧·양진영) 등 끝이 없었다.

예궁차오는 일본이 밀반출하려는 중국 10대 보물 중 으뜸인 모공정(毛公鼎)을 목숨을 걸고 지킨 공로자였다. 아내 위안융시는 고궁박물원의 모공정 진열실을 자주 갔다. [사진 김명호]

예궁차오는 일본이 밀반출하려는 중국 10대 보물 중 으뜸인 모공정(毛公鼎)을 목숨을 걸고 지킨 공로자였다. 아내 위안융시는 고궁박물원의 모공정 진열실을 자주 갔다. [사진 김명호]

1904년 장시(江西)성에서 태어난 예궁차오는 어린 시절을 베이징에서 보냈다. 20세기 초 베이징은 만주족과 한족의 거주지역이 달랐다. 한족 지식인들은 자녀들의 만주족 지역 출입은 엄격히 단속했다. 어른들이 그러건 말건 애들은 막무가내였다. 떼를 지어 만주족 구역에 가서 놀기를 즐겼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선 볼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신기한 물건과 희귀한 장난감, 맛있는 서양사탕이 아동들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만주족 어른들은 관대했다. 한족 아동들의 웬만한 실수는 모른 척했다. 한족 어른들은 달랐다. 만주족 지역 다녀온 것 알면 몽둥이를 들었다. 예궁차오는 예외였다. 다른 애들과 환경이 달랐다.

연경대 졸업 1년 연상 여성과 결혼

고궁박물원 도록에 실린 모공정. [사진 김명호]

고궁박물원 도록에 실린 모공정. [사진 김명호]

예궁차오는 세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계모는 만청(晩淸) 서화가 조지겸(趙之謙)의 유복녀였다. 어린 예궁차오를 방치했다 상황을 안 숙부가 분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아홉 살 된 조카를 집으로 데려왔다. 숙부는 중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시서화(詩書畵)의 대가였다. 조카 교육이 엄격하고 혹독했다. 고루하지도 않았다. 몽둥이 들고 영어와 고전 교육을 병행했다. 붓과 먹 다루는 법은 기본이었다. “객지에서 고독을 즐기려면 붓을 희롱할 줄 알아야 한다. 화날 때는 대나무를 그리고 즐거운 날은 난(蘭)을 쳐라.” 조카의 재능에 만족했다. 열여섯 살이 되자 미국으로 등을 떠밀었다.

명문 사립 앰허스트대학에 입학한 예궁차오는 유창한 영어와 품위 있는 문장으로 교수들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다. 대학 졸업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과정 마치고 프랑스 파리대학에 연구원 하다 보니 6년이 후딱 지나갔다. 22세 때 베이징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베이징대학 역사상 최연소 교수의 등장은 고도(古都)의 화젯거리였다. 교외에 자리한 연경(燕京)대학 여학생들은 베이징대학에 인접한 협화의학원 여학생만 보면 눈을 흘겼다. 예궁차오는 연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1년 연상의 위안융시(袁永嬉·원영희)에게 마음을 뺏겼다.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예궁차오와 위안융시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예궁차오는 산만하고 변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자주 했다. 근엄 떨다 갑자기 음담패설 늘어놓으며 깔깔대는 경우가 빈번했다. 술과 풍류도 즐겼다. 위안융시는 격조 넘치는 비범한 과학자였다. 항상 정갈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 불평도 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예궁차오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 손으로 온 교수와 저녁 먹던 중 음식이 맘에 안 들자 위안융시를 불렀다. “돼지나 주라”며 음식을 위안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위안은 침착했다.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일주일 후 말 한마디 없이 두 딸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30년간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소에 근무하며 예궁차오엔 편지는 물론 전화 한 통도 걸지 않았다. 외교부장인 남편 체면 깎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매년 국경일 행사에는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끝나면 비행장으로 직행, 미국으로 돌아갔다. 예궁차오 사망소식 듣고도 미국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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