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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쩡치, 신혼여행 온 헤밍웨이 못 만나고 학점만 펑크 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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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0〉

1940년 4월, 부인과 함께 전시수도 충칭의 군 부대를 방문한 헤밍웨이. [사진 김명호]

1940년 4월, 부인과 함께 전시수도 충칭의 군 부대를 방문한 헤밍웨이. [사진 김명호]

1960년 9월 ‘대만경비총사령부(경총)’가 자유주의자의 보루 ‘자유중국’을 봉쇄하고 사장 레이전(雷震·뢰진)을 감옥으로 보냈다. ‘자유중국’의 영혼이나 다름없던 총주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도 온전치 못했다. 대만대학 교수직은 유지하되 교단에는 서지 못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교수 겸직이 불가능한 교육부 한직으로 쫓겨났다. 한직도 보통 한직이 아니었다. 집무실은커녕 책상과 의자도 없었다.

10년간 ‘자유중국’ 문예란 주간 역임하며 문단에 바람을 일으켰던 녜화링(聶華笭·섭화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직자로 전락했다. 천하의 경총도 상상력과 빼어난 문장력은 어쩌지 못했다. 허리춤 불룩한 사람들이 집 주변 어슬렁거리고 가는 곳마다 미행이 붙어도 작가 녜의 명성은 흠집이 나지 않았다. 환자로 변해가는 인하이광 만나거나 레이전 면회 갔다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나는 날은 실성한 여자 같았다. ‘자유중국’ 초대 발행인 후스(胡適·호적) 원망하며 눈물도 닦지 않았다. 사정 아는 사람들 앞에서 웃음 잃지 않고 자존심 하나로 버티다 보니 성격이 변했다. 오만해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눈치 있는 친구나 작가들이 안쓰러워하는 줄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 1962년 11월, 모친이 평소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너는 결혼생활 14년 중 9년을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도쿄의 스캡(맥아더 사령부)에 간 후로는 단 한 번, 그것도 미국에 간다는 말 하러 온 것 외엔 편지 한 통도 없었다. 나 죽으면 이혼해라. 인하이광에겐 내 죽음 알리지 마라. 병문안 왔을 때 퇴원하면 맛있는 밥 해 주겠다고 했더니 좋아했다. 약속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어린애 같은 희대의 천재에게 혼이 떠난 모습 보여 주기 싫다.” 녜는 모친의 부음 듣고 달려온 인하이광을 모질게 대했다. “부탁이 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너만 보면 자꾸 죽고 싶다.”

녜, 선충원·딩링 등 작가·예술가 초청

남미 작가와 함께 아이오와에 도착, 녜화링을 방문한 왕쩡치(왼쪽). [사진 김명호]

남미 작가와 함께 아이오와에 도착, 녜화링을 방문한 왕쩡치(왼쪽). [사진 김명호]

1963년 1월, 미국 시인 폴 앵글이 대만을 방문했다. 미국문화원이 아이오와대학 부설 ‘작가공작방(作家工作坊)’을 운영하는 미국문화계의 실력자를 위해 환영연을 열었다. 초청장 받은 녜화링은 참석을 망설였다. “정부의 백색공포와 모친의 사망, 치료 불가능한 암 덩어리 같은 결혼생활, 어린 두 딸이 없었다면 살 이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재촉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주최 측이 작가들을 한 사람씩 폴에게 소개했다. 내 앞사람 대하는 폴은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녜는 오만함이 꼴 보기 싫었다. 자리를 뜨기로 작심했다. 폴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얘기 나누는 중국 시인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돌리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통역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날 페어뱅크가 대만 가면 꼭 만나 보라고 알려 준 이름이었다. 황급히 따라가 손을 내밀었다. 도도함이 다른 참석자들과 달랐다. 딴 약속 있어 미안하다며 고개만 숙일 뿐 악수는 거절했다. 녜화링은 아름다운 자석이었다. 끌려들어 가는 나를 밀쳐 버리고 연회장을 떠났다.”

부인 스쑹칭(施松卿)과 고향을 찾은 만년의 왕쩡치. [사진 김명호]

부인 스쑹칭(施松卿)과 고향을 찾은 만년의 왕쩡치. [사진 김명호]

이튿날 미국문화원장이 녜화링에게 전화했다. “폴은 이틀 후 홍콩으로 떠난다. 약속이 꽉 차 있다. 오늘 만찬모임 취소하고 녜 여사를 만나고 싶어 한다. 장소는 문화원에 우리가 마련하겠다.” 녜를 만난 폴은 말을 더듬거렸다. “아이오와대학에 자리를 마련하겠다. 거절하지 말기를 갈망한다.” 녜가 사정을 설명했다. “몸담았던 ‘자유중국’ 강제폐간으로 반은 연금상태나 다름없다. 출국이 불가능하다.” 그날 밤 폴은 녜화링을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헤어지면서도 했던 말을 반복했다. “꼭 미국에 와라.” 폴의 대만 일정은 엉망이 됐다. 떠나는 날까지 녜화링만 졸졸 따라다녔다. 홍콩, 파리, 런던, 베를린, 가는 곳마다 편지를 보냈다.

폴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경총이 녜화링의 출국을 허락했다. 딸들을 친척 언니에게 맡기고 미국에 온 녜화링이 폴에게 제안했다. “나라와 인종이 다른 세계 각국의 작가와 예술가를 초청해 쓰고 싶은 글 쓰고, 토론하고, 교유하는 국제적인 기구를 만들자.” 폴은 녜화링의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페어뱅크의 주선으로 포드재단이 거금을 지원한 ‘국제 창작계획(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을 출범시켰다.

왕, 미국 가자 헤밍웨이 출생지 찾아

헤밍웨이의 출생지를 찾아간 왕쩡치. [사진 김명호]

헤밍웨이의 출생지를 찾아간 왕쩡치. [사진 김명호]

냉전 말엽, 중국 대륙과 서구 세계의 장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러시아와 체코, 폴란드 외에 중국 작가들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녜화링은 선충원(沈從文·심종문), 딩링(丁玲·정령), 황융위(黃永玉·황영옥), 우주광(吳祖光·오조광) 등 문혁시절 고초가 극에 달했던 작가와 예술가를 아이오와로 초청했다. 지난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연결할 수 있는 작가도 물색했다. 전쟁시절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충칭(重慶)에 있었다는 노기자가 정보를 줬다. “3번째 부인과 중국에 신혼여행 온 헤밍웨이가 충칭에 있다는 신문 보고 달려온 서남연합대학 학생이 있었다. 헤밍웨이는 만나지도 못하고 한 학기 학점만 통째로 펑크 냈다. 소식 들은 헤밍웨이도 안타까워했다. 작가로 대성했다고 들었다.”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국작가협회에 왕쩡치(汪曾祺·왕증기) 초청 서신을 보냈다.

집안에서 요리하고 글 쓰고 몰래 술 마시느라 분주하던 왕쩡치는 작가협회 부주석의 방문에 술친구 왔다며 신이 났다. 잔이 몇 순배 돌자 부주석이 입을 열었다. “혁명이나 개혁을 노래하던 시대는 끝났다. 역시 미국이다. 대문호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와 문화계에 자리 잡은 네 대학동기들이 너를 기다린다.” 외국 나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던 시절이었다. 부주석은 몰래 왕쩡치를 입당시키고 출국절차를 밟았다. 왕은 부인이 사 준 양복 입고 아이오와로 갔다. 첫 번째 간 곳이 헤밍웨이 출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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