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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쩡치의 엄처 “술 없인 아름다운 글 안 나와 계속 마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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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9〉

1960년 ‘자유중국’이 폐간당한 후 녜화링(앞줄 오른쪽 셋째)은 대만을 뒤로했다. 재혼한 미국인 남편이 운영하는 아이오와대학 ‘세계작가 창작계획’에 합류했다. 감옥에 있던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과 서신 왕래를 그치지 않았고 대학에서 퇴출당한 인하이광(殷海光)에겐 ‘하버드대학 동아세아연구센터’를 통해 생활비를 지원했다. 2018년 참석자들과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1960년 ‘자유중국’이 폐간당한 후 녜화링(앞줄 오른쪽 셋째)은 대만을 뒤로했다. 재혼한 미국인 남편이 운영하는 아이오와대학 ‘세계작가 창작계획’에 합류했다. 감옥에 있던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과 서신 왕래를 그치지 않았고 대학에서 퇴출당한 인하이광(殷海光)에겐 ‘하버드대학 동아세아연구센터’를 통해 생활비를 지원했다. 2018년 참석자들과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자신의 재능을 본인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 최후의 사대부’ 왕쩡치(汪曾祺·왕증기)도 그랬다. 태평양전쟁 종결 후 왕은 학창시절 보낸 쿤밍을 떠났다. 하노이와 홍콩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국제도시는 살벌했다. 반기는 곳이 없었다. 베이징에 있는 스승 선충원(沈從文·심종문)에게 유서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 비로소 알았다. 위대한 스승과 친구들 실망시키지 않을 묘안이 떠올랐다. 더는 존재할 의미가 없다.”

선충원의 답장이 왕쩡치를 살렸다. “네게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강력한 무기, 학문과 지식과 문재(文才)가 있다. 붓을 들어라.” 맞는 말이다. 수재들의 집결지 서남연합대학 재학시절 왕의 학식에 명교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컬럼비아대학이 배출한 전 칭다오(靑島)대학 총장 양전셩(楊振聲·양진성)은 서남연합대학 재직 중 왕이 칠판에 쓴 낙서 보고 감탄했다. 학생들에게 공고했다. “기말시험에 모두 참석해라. 왕쩡치만은 예외다.” 비운의 시인 원이둬(聞一多·문일다)도 왕을 극찬했다. 기말시험 앞두고 서클 활동에 분주한 후배에게 왕이 대리시험을 자청했다. 답안지를 본 원이둬는 감동했다. 학생을 불렀다. “너 같은 제자가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열 번도 더 읽었다. 정말 잘 썼다. 학교신문에 실린 왕쩡치의 글보다 운치가 있다. 답안지에 곁들인 그림도 일품이다.”

백지에 몇 줄 쓰고 삽화까지 그려 건네

1987년 가을,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녜화링 자택에서 경극 한마당을 노래하는 왕쩡치. [사진 김명호]

1987년 가을,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녜화링 자택에서 경극 한마당을 노래하는 왕쩡치. [사진 김명호]

후배는 왕쩡치가 뭐라고 썼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이둬의 말이 길어질까 당황했다. 방문객이 찾아오자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황급히 나와 버렸다. 그날 밤 쿤밍의 찻집과 술집을 뒤졌다. 친절한 선배 발견하자 숨 헐떡이며 물었다. “내 수준도 생각해야지, 원이둬 선생 입이 벌어졌다.” 왕은 대충 쓰고 나왔다며 후배를 진정시켰다. 백지에 몇 줄 쓰고 삽화까지 그려서 건넸다. “네 이름으로 쓴 글이니 이젠 네 것이다. 내게 다그치지 마라.” 당대(唐代) 시인 이하(李賀) 작품의 특징을 요약한 명문이었다. 훗날 이 후배는 이하 연구자로 대성했다. 왕 사망 후 ‘왕쩡치 문집’ 편찬에 직접 참여했다. 50년 전 왕이 쓴 대리시험 내용을 문집에 포함시키며 반세기 전의 에피소드도 빠뜨리지 않았다. 마지막 한마디로 만인의 갈채를 받았다. “평소 글도둑보다 더한 도둑은 없다는 말 들을 때마다 찔끔했다. 그간 선배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돌려드리려고 했지만 내게 준 것이라며 거절당했다. 나도 선배 있는 곳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했다고 꾸중들을 일 상상만 해도 즐겁다.”

왕쩡치는 서화(書畵)에도 조예가 남달랐다. 원칙이 있었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기 위해 쓰고 그렸다. 한 점도 돈 받고 판 적은 없었다. 화상(畵商)들은 불만이 많았다. “왕쩡치의 그림과 글씨는 예쁘고, 까다롭고, 성질 개떡 같은 과부 같다”며 빈정대고 키득거렸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하루는 낯선 사람이 왕의 집을 찾아왔다. 화랑 주인이라며 용건을 말했다. ‘그림과 글씨를 구입하러 왔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화가나 서예가가 아니다. 주기만 했지 상품화한 적은 없다. 필요하면 자오푸추(趙樸初·조박초)나 우관중(吳冠中·오관중)을 소개시켜 주겠다.’ 화랑 주인이 왕 선생 그림 고가로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며 화를 냈다.”

주방에서 손님맞이 음식 준비에 분주한 왕쩡치. [사진 김명호]

주방에서 손님맞이 음식 준비에 분주한 왕쩡치. [사진 김명호]

왕쩡치는 헤밍웨이의 작품과 대만의 ‘자유중국’ 문예란 주필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글을 좋아했다. 마오쩌둥이나 레닌의 글은 돈 주고 산 적도 없고 그냥 받아도 딴사람 줘 버렸다. 1958년 우파로 분류되자 한바탕 웃어댔다. “다행이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인생이 너무 단조로울 뻔했다.” 왕은 4년간 고랭지의 감자연구소에서 감자와 자연을 스케치하며 고난과 화해했다. 연상의 부인 스쑹칭(施松卿·시송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감자연구소에 혼자 있다. 여기는 위대한 영도자도 없고, 회의도 없다. 내가 나를 관리하면 되는 신선과 같은 나날이다. 감자의 품종이 얼마나 다양한지 매일 관찰하며 쓰고 그려도 끝이 없다. 온갖 종류의 감자를 나보다 많이 보고, 그리고, 먹어 본 사람은 전 세계에 없다고 자부한다.” 문혁시절 홍위병들은 왕의 역작인 ‘중국감자도보(中國馬鈴薯圖報)’ 원고를 난로 속에 던져 버렸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톄닝(鐵凝·철응)은 지금도 이 얘기만 나오면 가슴 치며 발을 동동거린다고 한다.

서화 조예 깊은 왕, 돈 받고 판 적 없어

왕쩡치는 낮에는 글 쓰고 해 지면 지인들에게 줄 서화에 몰두했다. [사진 김명호]

왕쩡치는 낮에는 글 쓰고 해 지면 지인들에게 줄 서화에 몰두했다. [사진 김명호]

스쑹칭은 엄처(嚴妻)였다. 소문난 애주가 왕쩡치에게 금주령 내린 적이 있었다. 스의 말은 왕에겐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서재에 있던 스가 주방에서 저녁 준비하던 왕을 큰소리로 불렀다. 앞치마 두르고 잘못 들통난 초등학생처럼 서 있는 남편을 다그쳤다. “내가 술 끊으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최근 오밤중에 훔쳐 마시고 몰래 사다가 숨겨 놓고 마신 것 내가 다 안다. 주방에서 요리할 때 나 들어가서 쉬라고 한 이유도 알면서 모른 체했다. 며칠 전 친구 생일잔치 갔을 때 통음하고 경극 한마당 부른 것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왕이 잡아떼자 보고 있던 ‘문학월간’ 내밀며 웃었다. “방금 네가 발표한 단편소설 읽었다. 술기운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속 마셔라.” 두 사람은 이런 사이였다.

왕쩡치 사후 며느리가 스쑹칭에게 시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를 물었다. 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중문과 다니던 쩡치는 불량학생이었다. 나는 물리학과와 생물학과를 거쳐 외국문학과로 전과했다. 외문과 학생들은 중문과 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쩡치를 택한 이유는 재능,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말이다. 왕쩡치의 재능과 학식은 ‘중국 최후의 사대부’로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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