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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모공정 뺏을 수도" 예궁춰, 조카에게 보관 부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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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2〉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은 물론 시·서·화에 일가를 이룬 중화민국 외교부장 예궁차오를 좋아했다. 1956년 8월 14일 오후 서울을 방문한 예궁차오와 경무대에서 시담(詩談)을 나눴다. [사진 김명호]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은 물론 시·서·화에 일가를 이룬 중화민국 외교부장 예궁차오를 좋아했다. 1956년 8월 14일 오후 서울을 방문한 예궁차오와 경무대에서 시담(詩談)을 나눴다. [사진 김명호]

흔히들 말한다. “모공정(毛公鼎)은 비취에 조각한 배추(翠玉白菜), 돌덩어리 비슷한 옥으로 만든 돼지고기(肉形石)와 함께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의 3대 보물이다. 그중 으뜸은 누가 뭐래도 모공정이다. 사연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서주(西周) 말년인 기원전 828년, 즉위를 마친 선왕(宣王)이 숙부 모공에게 국가 대소사를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공의 일족이 금위군(禁衛軍)을 통솔해 왕가(王家)를 보위하고, 주식(酒食)과 이동수단, 의복, 무기의 하사를 관장해라.” 모공은 왕의 엄청난 지시를 자손들이 대대로 향유하기를 갈망했다. 적당한 크기의 정(鼎)을 주조했다. 안쪽에 왕이 한 말을 500자 정도로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00년 하고도 600여년이 흘렀다. 1843년 봄 산시(陝西)성 치산(岐山)현의 둥(董)씨 집성촌, 촌민 둥춘성(董春生·동춘생)이 모공정을 발굴했다. 소문이 퍼지자 베이징의 골동상인 쑤(蘇)씨 형제가 치산으로 달려갔다. 은 300냥으로 둥춘셩을 구워삶았다. 운반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에서 힘깨나 쓰던 둥즈관(董治官·동치관)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둥춘셩의 턱에 주먹 한 방 날리고 쑤씨 형제에게 호통을 쳤다. “둥씨 집안 공동 소유물이다. 돼지 5000마리와 소 200마리 들고 와라. 그때까지 내가 보관하겠다.” 쑤씨 형제는 현청(縣廳)으로 갔다. 거금으로 현의 우두머리 지현(知縣)을 매수했다. 지현은 보물을 사적으로 은닉한 죄로 둥즈관을 하옥시키고 모공정을 압수해서 쑤씨 형제에게 줬다.

영·미 부호들, 모공정 소유하려고 군침

홍콩의 예궁차오와 예충판. 사촌 남매보다 부부가 더 어울리는 사이였다. [사진 김명호]

홍콩의 예궁차오와 예충판. 사촌 남매보다 부부가 더 어울리는 사이였다. [사진 김명호]

형제는 모공정 들고 유유히 치산을 떠났다. 시안(西安)에 도착하자 모공정을 은밀한 곳에 숨겨 놓고 현지의 유명 서화가에게 일거리를 줬다. “정과 정 안에 있는 명문(銘文)을 임모(臨摹)해라.” 완성품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의 명사에게 기증했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명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식을 거르며 모공정 연구에 매달렸다. 모공정에 관한 최초의 해석, ‘주모공정고석(周毛公鼎考釋)’을 남기고 비실비실 앓다 세상을 떠났다.

다시 9년이 흘렀다. 1852년 베이징의 대수장가였던 금석학자 천제치(陳介祺·진개기)가 쑤씨 형제에게 은 1000냥을 주고 모공정을 넘겨받았다. 천은 모공정을 애지중지했다. 깊은 밀실에 숨겨 두고 혼자만 봤다. 부인들은 물론 자녀들도 밀실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타고난 건강체였다. 아들들보다 오래 살았다. 임종 무렵 유일한 손자에게 유언을 남겼다. “천하의 보물이 밀실에 있다. 개인이 끼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국가에 기증해라.” 손자는 조부의 마지막 말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시신이 식기도 전에 모공정 들고 양강(兩江)총독 돤팡(端方·단방)을 찾아갔다. 호기 있게 만 냥을 불렀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사후 북양대신 역임하며 청나라의 외교를 전담했던 돤팡은 모공정이 외국인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철없는 청년을 달랬다. “돈으로 사고팔 물건이 아니다. 내가 보관하겠다”며 보관료로 2만냥을 줬다.

화조화(花鳥畵)의 대가 위중린(喩仲林)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화조화(花鳥畵)의 대가 위중린(喩仲林)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6개월 후, 돤팡은 쓰촨(四川)에서 혁명파들에게 암살당했다. 돤의 아들은 모공정의 가치를 몰랐다. 가세가 몰락하자 텐진(天津)의 러시아 은행에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다. 영국과 미국의 부호들이 돤의 아들 집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대출금 갚아 줄 테니 모공정의 소유권 넘겨 달라며 어르고 달랬다.

명망가들이 모공정의 해외유출 방지에 나섰다. 교통총장과 교육총장을 지낸 대수장가 예궁춰(葉恭綽·엽공작)가 서화전을 열었다. 예궁춰의 글씨와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소장품인 송(宋)대의 문인화까지 몇 점 처분해 돈을 마련했다. 가명으로 구입한 모공정을 한동안 대륙은행 금고에 보관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모공정을 상하이 교외의 농가에 은닉하고 모조품을 한 개 만들었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압박하자 쿤밍(昆明)에 있던 조카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를 불렀다. “모공정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일본인과 미국인이 있다. 몇 번 팔라는 간청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상하이에 진입하면 모공정 뺏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충판(崇范)이 있는 홍콩에 가 있겠다. 전쟁이 끝나면 난징(南京)의 중앙박물관에 보내라.” 예궁차오가 숙부를 안심시켰다. “저는 맷집 하나는 타고 났습니다.” 모공정을 안전한 곳에 옮겨 놓고 모조품은 마을 소나무 밑에 묻었다.

예궁춰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누가 집 앞에 버리고 간 갓난 여자애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가는 곳마다 충판을 안고 다니며 어찌나 예뻐했던지 다들 친딸로 알았다. 예궁차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사촌 여동생 충판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충판은 예궁춰의 무남독녀이며 ‘천하의 기재(奇才) 예궁차오’의 여동생이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딜 가도 당당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오빠를 감옥에 가뒀다는 소식 접하자 홍콩을 떠났다.

명망가들, 모공정 해외유출 방지 나서

대만을 방문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와 한담을 나누는 예궁차오. 1957년 6월 3일, 중화민국 외교부장 집무실. [사진 김명호]

대만을 방문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와 한담을 나누는 예궁차오. 1957년 6월 3일, 중화민국 외교부장 집무실. [사진 김명호]

상하이에 도착한 예충판은 일본 특무기관장을 부친의 그림 한 점으로 매수해 버렸다. 일본은 두드려 패도 꿈쩍 않는 예궁차오를 설득하기 위해 충판을 이용했다. 매일 장시간 면회를 허용했다. 사정을 아는 충판은 모공정의 모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극 정성으로 옥 뒷바라지만 열심히 했다. 하루는 특무기관장에게 오빠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오빠 설득을 자청했다. “오빠는 변덕이 심하다. 평소 내 말은 잘 들었다. 세 사람이 만날 자리 마련해라. 내가 울면서 설득하겠다.”

특무기관장 집무실에서 예궁차오를 만난 충판은 울면서 하소연했다. “모공정인지 뭔지가 아무리 보물이라도 오빠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 중국은 난세다. 굴러다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일본이 관리하는 것이 안전하다. 끝까지 거부하다 옥사하면 나도 강물에 뛰어들겠다.” 몇 날 며칠 같은 요구 되풀이하며 훌쩍거리자 예궁차오도 두 손을 들었다. 충판에게 모공정 복제본 있는 곳을 알려줬다.

감옥에서 풀려난 예궁차오는 충판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말이 사촌일 뿐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전형적인 남녀관계다.” 철벽도 종이자락보다 쉽게 뚫는 것이 소문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촌 남매 사이를 의심치 않았던 예궁차오의 부인은 사실을 확인하자 어이가 없었다. 당시 예충판은 유부녀였다. 동료 교수 앞에서 음식 맛없다며 밥상 뒤엎은 사건은 별것도 아니었다. 예궁차오와 완전히 결별했다.

임종을 앞둔 예궁차오는 마지막 숨 헐떡이며 모공정을 원망했다. “모든 것이 모공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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