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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일본엔 원폭 2개·대만엔 1000개 맞먹는 장제스 투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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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3〉

직접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천이. 1947년 3월 3일,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직접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천이. 1947년 3월 3일,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1935년 5월 일본은 대만통치 40주년 기념을 앞두고 푸젠(福建)성 주석 천이(陳儀·진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평소 친일파 소리 듣던 천이는 난징(南京)의 중앙정부에 의견을 구했다. 허락이 떨어졌다. “중앙정부와는 상관없는, 현지 고찰(考察)을 위한 지방성 외교 형식을 취해라.”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친서를 보냈다. “청년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의 군·정계 요인들을 두루 만나라. 중·일 관계는 복잡하다.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실리를 취하는 것이 외교다. 농담 속에 진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현란한 칼춤을 추고 와라. 부인과 동행 여부는 알아서 결정해라.” 타이베이에서 열린 경축활동에 참석한 천이에게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친일파다. 부인도 일본인이다.” 천이는 누가 뭐라건 끄떡도 안 했다. 모두 사실이었다. 일본 패망 전까지 대만에 부임한 총독 10명이 천의 육군대학 선배나 후배였다.

천이 “국가 부강해지려면 국민 총명해야”

일본 항복 의식을 마친 대만성 행정 장관 천이(앞줄 오른쪽 여덟째). [사진 김명호]

일본 항복 의식을 마친 대만성 행정 장관 천이(앞줄 오른쪽 여덟째). [사진 김명호]

1945년 초, 국민정부는 전쟁 승리를 앞두고 ‘대만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천이를 주임에 임명했다. 천이는 ‘대만 간부훈련반’을 신설하고 대만총독이 보내 준 대만법령휘편(臺灣法令彙編)을 집중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40만 자에 달하는 보고서를 근거로 ‘대만접수관리계획안’을 만들었다.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천이는 가슴을 쳤다. “접수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손을 들었다.” 대만 행정장관에 임명되자 졸업을 4개월 앞둔 훈련반원 120명 이끌고 대만으로 갔다.

10월 25일 ‘타이베이공회당’에서 대만 주둔 일본군의 항복의식이 열렸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천이는 자신이 넘쳤다. “대만은 전리품이 아니다. 원래 중국영토다. 나는 일을 하러 온 사람이다. 많은 협조 바란다. 나도 협조를 게을리하지 않겠다.” 천은 생활습관이 검박했다. 총독 관저 입주를 거절했다. “나는 백성의 머리에 올라탄 총독이 아니다, 공복일 뿐이다.” ‘대만전력’이 관리하던 영빈관에 몸을 풀었다. 정부기관에 배치했던 무장 경비원도 철수시켰다. 행정장관공서(公署) 초소도 두 개만 남기고 없애 버렸다. 산책 나왔다가 궁차루(公洽路)란 거리이름 발견하자 버럭 화를 냈다. 당장 보아이루(博愛路)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유가 있었다. 보아이(박애)는 국부 쑨원(孫文·손문)이 추종자들에게 잘난 척하고 싶을 때 즐겨 써 주던 글귀였다. 궁차는 천이의 자(字)였다.

일본 투항 무렵 대만에는 40만의 무장부대와 30만 정도의 일본교민이 있었다. 일본총독부 관원들이 천이가 파견한 선발대에 건의했다. “일본은 만신창이가 됐다. 파멸 직전이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다. 만주와 대만, 조선, 동남아에 있는 교민들이 본국 일본으로 단시간 내에 몰려오면 실업(失業)문제로 혼란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 교사, 의사, 기술자 같은 고급인력이 일본에 돌아가면 실업자로 전락한다. 이들은 전문가들이다. 대만에 잔류시키는 것이 양국에 이익이다. 천이 행정장관에게 건의해 주기 바란다.” 천이는 총독부의 건의를 수용했다. 군인을 제외한 각 분야의 전문 인력 8000명과 가족 3만 명을 원래 자리에 있도록 했다.

2·28사건의 발원지 톈마다방. 지금도 2월 28일만 되면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 김명호]

2·28사건의 발원지 톈마다방. 지금도 2월 28일만 되면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 김명호]

푸젠성 주석 시절 천이는 교육을 중시했다. “총명이 최대의 힘이다.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국민이 총명해야 한다.” 가는 곳마다 3가지를 강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정이 중단되면 안 되고, 공장이 문 닫으면 안 되고, 학업이 중단되면 안 된다.” 대만대학 교원을 확충하고 교원양성을 추진했다. “술이나 퍼마시고, 도박 좋아하고, 교장과 학부모 눈치나 보는 교사들은 모교를 빛낼 졸업생을 배출할 수 없다. 일본인들만 다니던 총독부 부설 고등학교 자리에 대만사범대학을 설립해 우수한 교사들을 양성해라.”

천이의 꿈은 국·공내전으로 좌절됐다. 전쟁으로 인한 대륙의 경제위기가 대만을 덮쳤다. 통화팽창으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1946년 1월부터 47년 2월 ‘2·28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3개월간 쌀값이 4.8배, 밀가루는 5.4배, 소금은 7.1배, 설탕은 22.3배로 폭등했다. 1946년 10월 25일, 대만광복 1주년 기념식에 장제스가 참석했다. 노래하고, 사자춤 추고, 폭죽이 터졌지만 대만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전 총독부 앞에 ‘개 떠난 자리에 살진 돼지가 왔다’는 제목의 풍자만화가 걸리는가 하면 ‘일본이 우리를 버렸다’며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간도 크고, 겁도 없는 대만대학 교수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미국을 성토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중국인들에겐 너무 가혹하다. 일본에는 원자탄 2개가 고작이고 대만에는 원자탄 천 개에 맞먹는 장제스를 투하했다.”

장제스, 2·28사건 폭란 인정·군대 파견

단속이 심할수록 가짜도 범람했다. 담배가 특히 심했다. 2월 27일 오후, 전매국 감시원들이 경양식과 커피로 유명한 ‘톈마(天馬)다방’ 앞에서 가짜 담배 파는 과부를 적발했다. 연행에 불응하며 반항하자 구경꾼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겁 많은 감시원이 권총을 빼 들었다. 차마 쏘지는 못하고 손잡이로 과부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피를 본 군중이 분노했다. 감시원들과 충돌했다. 2명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감시원 대장이 실탄을 발사했다. 1명이 스러지자 군중들도 흩어졌다. 그 틈에 감시원들은 공포를 쏘며 도망갔다. 소문이 퍼졌다. “대륙에서 온 외성(外省)인들이 본성(本省)인을 살해했다.” 군중들이 경찰국과 헌병대로 몰려갔다. 범인 처벌을 요구했다.

28일 오전 성안 시민들이 전매국을 포위해서 불 지르고 행정장관공서로 이동했다. 위병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반독재, 반전제, 반폭행, 민주 쟁취, 자치 쟁취 구호가 타이베이 전역에 만연했다. 천이는 타이베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의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대만인들은 철시와 등교 거부, 파업으로 맞섰다. 행정장관공서와 경찰국, 방송국, 일인재산처리위원회를 포위하고 파출소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부는 군용창고에 몰려가 무기를 탈취한 후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석방했다. 방송국도 점령했다. 군·경의 폭행과 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이 전파를 탔다. 웅크리고 있던 대만공산당이 기지개를 켰다. 무장세력을 동원해 가오슝(高雄)과 지룽(基隆)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천이가 난징에 급전을 보냈다. “폭란이 발생했다. 신속한 군대 파견을 청한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도 2·28사건을 폭란으로 인정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인 21군 선발대를 대만으로 파견했다. 선발대는 국민당군의 최정예였다. 지룽항에 도착하자 선상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상륙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망자 숫자도 각양각색이다. 타이베이 주재 미국영사관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행정원의 조사 보고가 걸작이었다. “1만8000명에서 2만8000명 정도가 사망했다. 3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은 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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