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성인이 본성인 씨 말려” 대만공산당 폭동에 합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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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4〉

2·28사건 1주일 후 대만 엘리트 6명을 공개 총살한 장화(彰化)역 광장. [사진 김명호]

2·28사건 1주일 후 대만 엘리트 6명을 공개 총살한 장화(彰化)역 광장. [사진 김명호]

일본의 대만 식민통치 기간 노예화 교육의 기초는 언어였다. 중국어와 푸젠(福建)방언 민남어(閩南語) 사용 엄금이 추상같았다. 원주민을 제외한 대만인은 푸젠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집안 일상용어였던 민남어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중국어(국어) 사용은 금기(禁忌)였다. 들키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50년에 걸친 고압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1945년 일본 패망 무렵 대만 신세대 대부분이 중국어를 못했다. 대만인 70% 이상이 일본어를 구사했다. 작가들도 중국어보다 일본어가 편했다. 일단 일본어로 썼다가 낑낑대며 중국어로 바꿔 적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행정장관공서는 국어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대륙에서 국어발음 정확하고 문장력이 빼어난 교사들을 전국적으로 모집해 국어 보급에 나섰다. 평생 일본어만 접한 30세 이하는 대륙인과의 문화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심했다. 단시간 내에 중국문화 흡수가 불가능했다.

대만 접수 국민당, 국어추진위 발족

2·28사건 진압과 대만 엘리트 제거 및 공산당원 적발을 지휘한 펑멍지(彭盟緝·오른쪽). 3군 참모총장과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왼쪽은 장징궈. [사진 김명호]

2·28사건 진압과 대만 엘리트 제거 및 공산당원 적발을 지휘한 펑멍지(彭盟緝·오른쪽). 3군 참모총장과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왼쪽은 장징궈. [사진 김명호]

50년간 일본문화에 흠뻑 젖었어도 대만인들은 국민당 정부의 대만 수복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대륙에서 대거 몰려와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자신을 본성인(本省人), 대륙에서 온 국민정부 관리나 가족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렀지만 적의가 내포된 구분은 아니었다. 국민당에서 파견한 고위관원들 중에는 민의가 뭔지 모르고, 뱃속 채우는 재능만 탁월한, 엉터리들이 섞여 있었다. 인재 발굴이라는 기본의무를 망각했다. 임인유친(任人唯親), 말 잘 듣고 친한 것이 기용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대만인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외성인 관원들은 대만사정에 어두웠다. 식민지 시절 대만을 떠나 대륙을 떠돌다 광복 후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활용했다. 본성인은 이들을 반산(半山)이라 부르며 뒤에서 손가락질했다. 반산은 거의 다 국민당원이었다. 대만 전역 휘젓고 다니며 일본인이 놓고 간 토지와 공장을 몰수하고 재물 긁어모아 저도 먹고 윗사람에게도 갖다 바쳤다. 광복 초기의 환희와 기대가 1년 6개월 만에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모든 책임을 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에게 돌렸다. 행정장관공서를 ‘천이 주식회사’라 부르며 저주했다.

웅크리고 있던 대만공산당엔 이런 호재가 없었다. 반전제, 반독재, 민주쟁취, 자치요구 등 군중운동 일으킬 조건이 완비됐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기회 오기만 기다렸다. 1947년 2월 27일 담배 팔던 여인 구타사건을 계기로 이튿날부터 폭동이 일어나자 기지개를 켰다. 외성인이 본성인의 씨를 말릴 작정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무기고를 털고 죽창으로 무장했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외성인들을 쏴 죽이고 찔러 죽였다. 대륙의 국민당 중앙은 군대를 파견해 가혹할 정도로 대응했다. 본성인을 자부하는 작가, 언론인, 예술가, 법조인, 의료인들의 씨를 말렸다. 실패를 자인한 대만공산당 지도부는 대만을 탈출했다. 홍콩을 거쳐 대륙으로 들어갔다.

“2·28사건, 본성인의 외성인 배척 탓”

대만공산당에 치명타를 안긴 심리전의 귀재 구정원(谷正文). [사진 김명호]

대만공산당에 치명타를 안긴 심리전의 귀재 구정원(谷正文). [사진 김명호]

한동안 2·28 사건의 원인은 외성인들의 대만인 멸시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외성인, 본성인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사람이 죽다 보니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2006년 3월 초, 70세 생일을 앞둔 린밍주(林明珠·임명주)라는 평범한 여인이 목격자 자격으로 1947년 2월 27에 있었던 일을 공개했다. “국민당 담배 단속원이 권총 손잡이로 머리 후려치자 피 흘리며 쓰러졌다는 담배장수 린장마이(林江邁·임강매)가 내 모친이다. 당시 나는 열 살이었다. 매일 엄마 옆에서 일을 도왔다. 국민당 관원 한 사람이 웃으며 다가왔다. 담배 고르며 묻는 모습이 살 눈치였다. 관원은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일어와 민남어만 할 줄 알았던 우리 모녀는 당황했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친의 황급한 도움 요청을 대륙에서 온 국민당 관원이 대만인 모녀를 조롱했다고 오인했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멱살 잡고 항의하자 관원이 권총을 빼 들었다. 순전히 언어 문제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것도 국민당 관원의 무자비한 폭행에 피 흘리며 쓰러졌다고 알려진 사람 딸의 말이다 보니 무게가 있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국민당 책임으로 일관하던 민진당과 대만독립파도 입을 닫았다. 국민당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광복 초기 국민당이 대만인들의 민심확보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만공산당 지하조직을 지휘한 차이샤오간(蔡孝乾). 구정원에게 당원 명단 넘기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사진 김명호]

대만공산당 지하조직을 지휘한 차이샤오간(蔡孝乾). 구정원에게 당원 명단 넘기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사진 김명호]

홍콩, 대만지구와 해외의 화교 연구단체 2·28사건 발발 원인을 본성인의 외성인 외부인 배척운동으로 단정했다. “폭동을 일으킨 본성인들은 거리를 점거하고 행인들을 불러 세웠다. 민남어로 물어봐서 대답하면 일본어로 물어봤다. 통과하면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불러 보라고 요구했다. 외성인은 일본어와 민남어로 답할 방법이 없었다. 일본여인과 결혼하거나 동거 중인 외성인도 일본국가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재수 좋으면 온갖 모욕 받으며 얻어터지고 끝났다. 명 짧은 사람은 즉석에서 죽창에 선혈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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