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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 대만사범대 무자비 진압…38년간 ‘백색공포’ 시달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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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5〉 

‘4·6사건’ 진압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가운데)는 선배들을 제치고 군과 외교계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주일대사 시절 전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관(오른쪽)과 교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4·6사건’ 진압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가운데)는 선배들을 제치고 군과 외교계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주일대사 시절 전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관(오른쪽)과 교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1949년 5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 4야전군’이 대륙의 배꼽 우한(武漢)에 깃발을 꽂았다. 이틀 후 대만성 주석 천청(陳誠·진성)이 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간단한 포고문이 뒤를 이었다. “계엄 기간 파업을 엄금하고 0시부터 5시까지 통금을 실시한다. 위반자는 사형에 처한다. 출입국 관리를 엄격히 강화한다. 벽보와 삐라 살포를 엄금한다. 무기와 탄약의 휴대와 운반을 금지한다. 외출 시 신분증을 지참해라. 위반자는 군법으로 엄격히 다스린다.”

일반적으로 1987년 7월 15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38년간을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라고 불렀다. 기간을 더 길게 잡는 학자들도 있다. “1949년 4월 6일 대만대학과 대만사범대학 학생사건부터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시작되는 1992년까지를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로 봐야 한다.” 진상이 밝혀질수록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계엄령의 도화선을 아직도 2·28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외국의 얼치기 좌파 연구자라면 모를까, 대만과 대륙의 비중 있는 학자 중에는 그런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2·28사건 이후 대만공산당 지도부는 대륙으로 도망갔지만 좌풍(左風)은 유행했다. 중공과 상관없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좌익사조에 내포된 얄궂은 낭만적 요소가 유혹했기 때문이다.

대만 학생들이 영향받은 난징의 반정부 학생시위. [사진 김명호]

대만 학생들이 영향받은 난징의 반정부 학생시위. [사진 김명호]

학생들은 사회단체나 학생회 등 자치조직을 통해 시름을 달랬다. 선언문 발표하고, 표어 부치고, 시위하며 국민당의 실정을 비판했다. 극소수의, 공산당이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던 학생들은 학원가에 사단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 사소한 사건이라도 일단 터지기만 하면 대형사태로 확대시키기 좋은 환경이었다. 기회가 일찍 왔다. 3월 20일 밤 10시쯤 경찰관이 자전거 1대에 같이 타고 가던 대만대학과 사범대학 학생을 교통위반이라며 제지했다. 말다툼이 주먹질로 비화되자 주변에 있던 경찰관들이 몰려왔다. 실컷 얻어터진 두 명의 학생은 타이베이 경찰국 제4분국으로 끌려갔다. 경찰 중에는 프락치가 있었다. 날이 밝자 두 대학에 소문이 낭자했다. 학생들이 경찰국으로 몰려갔다.

장제스 총애받는 펑멍지 부사령관에 지시

‘4·6사건’ 후 중공 간첩으로 밝혀진 참모차장 우스(吳石)의 처형 직전 모습. [사진 김명호]

‘4·6사건’ 후 중공 간첩으로 밝혀진 참모차장 우스(吳石)의 처형 직전 모습. [사진 김명호]

경찰국을 포위한 학생들이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학생 두 명을 석방해라. 폭력 경찰 징계해라. 의료비를 배상해라. 경찰국장이 직접 부하들의 잘못을 사과해라.” 공산당이 고대하던 사건의 막이 올랐다. 이튿날 민간인까지 합세한 시위가 벌어졌다. 군인과 경찰 정보요원들은 대륙의 반기아운동과 반정부운동 때 익히 듣던 구호가 등장하자 긴장했다. 노래도 격렬했던 난징(南京)의 반미시위 때 부르던 것과 같았다. 경찰국장은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줘도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학생과 군경의 대립도 해소는커녕 더 악화됐다. 학생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 3월 28일 밤 대만대학과 사범대학은 물론 타이베이의 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까지 포함) 자치연합회(서클에 해당)까지 연합해 청년절 경축행사를 열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구호 외친 후 열린 회의에서 ‘대만성 학생연합회’ 성립을 의결했다. “상황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의 역량을 결집시켜 정부 당국을 압박하자.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다.”

4월 1일 난징에 출장 중이던 성 주석 천청이 황급히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경총(경비 총사령부)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팽맹집)에게 지시했다. “학생들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 공산당의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 질서에 영향을 끼칠까 두렵다. 엄격히 대처해라.” 기한도 정해 줬다. “주모자 명단 작성해서 4월 5일 일망타진해라.” 당부도 잊지 않았다. “푸대포와 셰둥민(謝東閔·사동민)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조를 구해라. 여학생 체포는 신중을 기해라. 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자다. 잘못했다간 반란 주도자가 훗날 영웅으로 둔갑할 수 있다.” 대포는 큰소리치기로 유명한 대만대학 교장 푸스녠(傅斯年·부사년)의 별명이었다. 푸는 베이징대학 교장을 역임했던 교육계의 원로였다. 학계에 남긴 업적이 전국에 널려 있는 대학 교장들과는 격이 달랐다. 청년 시절도 화려했다. 중국역사에 한 획을 그은 1919년 ‘5·4학생운동’과 ‘신문화운동’의 대장 격이었다. 셰둥민은 대륙에서 교육받은 대만 출신 관료였다.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푸는 비난받고 셰는 추앙받았다.

“총보다 더 무서운 게 여자, 체포 땐 신중”

베이징대학 교장 시절 장제스와 함께한 푸스녠(왼쪽). [사진 김명호]

베이징대학 교장 시절 장제스와 함께한 푸스녠(왼쪽). [사진 김명호]

경총이 파악한 체포대상은 많지 않았다. 대만대학 15명, 사범대학 6명이었다. 4월 5일 밤 무장한 군경이 두 대학에 진입했다. 푸스녠은 공산당이라면 질색이었다. 군경을 기숙사 학생 방까지 안내하며 체포에 협조했다. 사범대학은 학생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 명단에 있던 체포 대상자들은 도망쳤다. 사정 모르는 학생들은 동료 학생 보호에 나섰다. 몽둥이 들고 군경과 대치했다. 난투극도 불사할 기세였다. 경총도 폭력으로 맞섰다. 4월 6일 오전 무장병력 동원해 방어선 치고 학교에 난입했다. 저항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다. 찢어진 치맛자락 움켜쥐고 발 동동 구르는 여학생도 봐주지 않았다. 머리통 깨지고 팔다리 부러진, 기숙사에 있던 학생 300명 전원을 끌고 갔다. 소문이 난무했다. “셰둥민은 진정한 교육자다. 끝까지 군경진입을 거부했다. 푸스녠은 학생을 보호하지 않았다. 교장 자격이 없다.”

푸스녠은 세간의 입놀림 따위는 한 귀로 흘렸다. 성 주석 천청 찾아가 네 가지를 요구했다. “하루빨리 명단에 있던 학생들을 재판에 회부해라. 체포한 학생 중 명단에 없던 학생은 즉시 석방해라. 이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교내에 진입해 학생을 체포하겠다는 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학교 측의 체포된 학생 면담을 허용해라.” 푸의 요구는 한 건도 성사되지 못했다. 경총은 체포 당일 학생 7명을 총살시키며 ‘백색공포 시대’를 예고했다.

푸스녠은 충격이 컸다.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앓았다. 1950년 겨울, 성탄절 닷새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54세, 당시에도 많지 않은 나이였다. 1999년 봄 노년에 들어선 푸의 제자들이 스승을 회상했다. “그 성질에 백색공포 안 보고 세상 하직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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