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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공포 시대 저물자 “역사 속 위인도 악인도 그놈이 그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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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6〉

대만 경비총사령관 황제(黃杰)의 생일에 함께한 백색공포의 주역들. 왼쪽 둘째가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 얼굴만 보이는 사람(왼쪽 넷째)이 계엄령 시대의 저승사자 펑멍지(彭孟緝). [사진 김명호]

대만 경비총사령관 황제(黃杰)의 생일에 함께한 백색공포의 주역들. 왼쪽 둘째가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 얼굴만 보이는 사람(왼쪽 넷째)이 계엄령 시대의 저승사자 펑멍지(彭孟緝). [사진 김명호]

1987년 여름 대만의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단안을 내렸다. 38년간 지속시킨 계엄령 시대를 제 손으로 종식시키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철혈(鐵血)정치가’의 결자해지와 죽음은 비장미가 넘쳤다. 2·28사건을 시작으로 대만 전역을 휘감았던 백색공포(白色恐怖)시대의 사건들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회자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역사는 감상용이다. 절대 믿으면 안 된다. 현자(賢者)는 역사를 즐기지 믿지는 않는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이나 악인도 깊이 들어가 보면 그놈이 그놈이다.” 지난날에 관심이 덜해도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안개 속에 있던 일들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펑밍민, 밀우 리덩후이보다 조건 좋아

말년의 펑밍민(왼쪽)과 리덩후이. [사진 김명호]

말년의 펑밍민(왼쪽)과 리덩후이. [사진 김명호]

계엄령 시대의 사법부는 군인, 경찰, 특무기관의 노예였다. 종사자 대부분이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 하나는 두꺼웠다. 계엄 해제 후 불법부(不法府)나 무법부(無法府)였다고 손가락질해도 대부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양심적인, 가벼운 반발도 있었다. “법은 신성하다. 우리는 징치반란조례(懲治叛亂條例)에 따라 조사하고 재판을 거쳐 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우리 모르게 처형당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많다는 것 알아도 군사법정은 우리와 상관없다며 모른 체했다. 우리도 사람이다. 양심이 있고 실수도 범할 수 있다. 사과하면 흐지부지되는 실수가 태반이다.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인정하면 파장이 크다 보니 철면피가 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선배에게 법은 철학이라는 말 듣고 이 길 택한 것이 후회된다. 법은 신성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우쭐대기 좋아하는 속물이 신성한 것을 다루자니 너무 힘들다. 사죄는 못 해도 돌팔매는 맞겠다.”

통계에 의하면 백색공포 시절 군사법정은 정치적 사건 2만9407건을 판결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14만 명을 웃돌았다. 당시 대만 인구가 400만을 겨우 넘을 때였다. 국민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만 전역의 감옥이 만원이었다. 타이베이는 권력의 중심지였다. 수감자들은 타이베이에 와서 조사받고 재판받았다. 지금의 타이베이역 건너편 구 힐튼호텔 자리는 정치범만 재판하던 군법처였다. 명동 격인 시먼딩(西門町)의 스즈린(獅子林) 일대에는 고문으로 유명한 보안처가 있었다. 1952년 군법처에는 재판 대기자가 워낙 많았다. 정치범들을 교외에 있는 전 일본군 장교감옥으로 옮겼다. 유일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1955년 수감자 2411명 중 875명의 죄명이 반란죄였다. 반란범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1970년 1월 대만 탈출 후 스웨덴에 도착한 펑밍민. [사진 김명호]

1970년 1월 대만 탈출 후 스웨덴에 도착한 펑밍민.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 기간 보안처와 군법처를 거친 정치범 중 4만여명이 총살로 목숨을 잃었다. 운 좋은 사람은 12년에서 15년형이 기본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수용할 감옥이 부족했다. 방은 좁고 수감자는 많았다. 동시 취침이 불가능했다. 교대로 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반은 자고 반은 앉아 있다. 시내 곳곳, 일본인이 쓰던 건물들을 감옥으로 개조했다. 처형장도 도처에 있었다. 초대 대만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도 온전치 못했다. 1950년 6월 18일 신뎬(新店)의 군인감옥 잔디밭에서 공산당과 내통한 죄로 의연히 총탄세례를 받았다. 자존심 강한 장제스는 천이의 정치적 배신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만인 선무(宣撫)에 이용했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된 2·28 사건의 책임추궁이라고 발표했다.

국민당은 대만독립 주장하는 대독파(臺獨派)를 간첩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대독파의 대부 펑밍민(彭明敏·팽명민)은 예외였다. 대만의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펑은 어릴 때부터 서구문화에 익숙했다. 형이 유학 중인 일본 고등학교 재학 시절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부친과 형의 반대로 프랑스문학 연구가 좌절되자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일본이 그간 유예시켰던 인문계 학생 징집령을 내렸다. 징집통지서는 염라대왕의 초청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이 있는 나가사키로 피신 가던 도중 미군의 공습으로 왼쪽 팔을 잃었다.

펑, 장징궈 감옥 시찰한 날 석방돼

계엄령 해제 후 장제스를 ‘히틀러 같은 도살자’라고 규탄하는 현수막 걸고 시위하는 피해자 유족들. [사진 김명호]

계엄령 해제 후 장제스를 ‘히틀러 같은 도살자’라고 규탄하는 현수막 걸고 시위하는 피해자 유족들.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대만대학은 일본의 제국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의 전학을 허락했다. 펑밍민은 대만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밀우(密友)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와 함께 국민당의 중점 배양 대상이었다. 조건은 펑밍민이 리덩후이보다 좋았다. 대만대학 졸업 후 캐나다와 프랑스 유학을 마치자 국민당이 34세의 펑에게 입당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엔대표단 고문’과 ‘대만대학 정치학과 주임’ ‘대만10대걸출청년’ 선전 등 선물보따리를 안겨 줬다. 펑은 “학술에만 전념하겠다”며 권력의 농락을 거절했다.

1964년 초 제자 2명과 대만의 미래를 토론하던 중 대만인민자구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내용이 엄청났다. “세계는 한 개의 중국과 한 개의 대만을 인정해라. 대만에서 국민당 정권이 유지되는 이유는 미국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은 점차 중공 승인으로 기울 것이 확실하다. 국민당이 주장하는 대륙수복은 절대 불가능하다. 국민당 정부는 이미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다. 대만을 대표하는 정부도 아니다. 1947년 선거 2년 후 중국에서 쫓겨나자 패잔병들이 대만을 점거했다. 현재 대만 인구의 85%가 대만인이다. 중앙 입법원의 대표 중 대만인은 3%에 불과하다. 대만인과 대륙인의 합작이라는 국민당의 선전은 갈등을 부추기는 책략이다. 장제스는 이미 황제다. 우리는 사망하기만 기다릴 뿐이다. 절망한 장징궈가 대만을 대륙에 넘겨줄까 우려된다. 청년 시절 장징궈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추종자였다. 아직도 혈액에 공산주의자의 피가 섞여 있다.”

정부가 무고도 상관없다며 고발을 독려하던 시대였다. 선언문 보고 놀란 인쇄소 주인의 밀고로 펑밍민은 구속됐다. 10년형 선고받자 장징궈가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했다. 펑이 수용된 감옥을 시찰 나왔다. 그날 밤 펑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대만의 출입국 관리는 철저했다. 펑은 외부출입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변장하고 대만 탈출에 성공했다. 변장술이 탁월했던지 그날따라 공항 경비가 허술했는지, 선언문 일부 내용에 공감한 장징궈가 무슨 작용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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