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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공산 비적 선전술 뛰어나도 이념은 우리가 옳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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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7〉

2·28 사건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화가 황융위(黃永玉)가 타이베이의 거리 풍경을 판화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2·28 사건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화가 황융위(黃永玉)가 타이베이의 거리 풍경을 판화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2·28사건과 4·6사건을 경험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대만 통치를 강화하고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당 원로와 당 간부, 군 지휘관들에게 절실한 심정을 토로했다. “지구상에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적인 정당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늘의 국민당처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정당도 없었다. 혁명정신이 완전히 시들어 버린, 이런 썩어 빠진 정당은 진작 쓸어버렸어야 했다.” 군 지휘관들은 호된 질책을 당했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장비, 전투능력, 경험에서 공산군은 우리의 비교 대상이 못 됐다. 장교들의 기량과 지식이 부족했다. 세심한 검토와 준비도 철저하지 않았다. 지금 군사령관이나 사단장직에 있는 너희들이 외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면 연대장이나 대대장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중국이 워낙 낙후되고 인재가 없다 보니 너희 같은 것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반공·국학 서적 출간 열 올려

한 자리에 모인 대만 계엄령 시대의 주역들. 왼쪽부터 총 정치부 주임 장징궈, 총참모총장으로 승진한 펑멍지. 펑후(澎湖)방위사령관 후쭝난(胡宗南), 국방부 부부장 위안서우첸(袁守謙), 경총사령관 황제(黃杰). [사진 김명호]

한 자리에 모인 대만 계엄령 시대의 주역들. 왼쪽부터 총 정치부 주임 장징궈, 총참모총장으로 승진한 펑멍지. 펑후(澎湖)방위사령관 후쭝난(胡宗南), 국방부 부부장 위안서우첸(袁守謙), 경총사령관 황제(黃杰). [사진 김명호]

남이 했으면 백번 죽어도 모자랄, 공산당 칭찬도 했다. “공산 비적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과 국민당엔 없는 조직, 기율, 도덕성을 갖췄다. 문제를 철저히 연구하고 계획도 완벽히 실행한다.” 후회도 숨기지 않았다. “군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지휘권 통일을 위해 군대의 모든 단위에 있었던 정치위원 제도를 없앴기 때문이다. 지휘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불가능했다. 보고의 정확성 여부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 보니 부패와 퇴폐가 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공산 비적들의 조직과 훈련, 선전술이 우리보다 뛰어나도 이념과 사상, 정치노선은 우리가 옳고 민족의 필요성에 더 부합된다.”

1950년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권한으로 ‘국민당 중앙개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 충성덩어리 천청(陳誠·진성)을 임명했다. “그간 아는 사람만 요직에 기용한 내 잘못이 크다. 생면부지의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라.” 당내에는 장제스에 반대하는 파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은 개혁위원회의 ‘개조운동’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철저히 당에서 쓸어 냈다. 군 정치위원 제도도 부활시켰다. ‘총 정치부 주임’에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임명했다. 당시는 계엄령시대 초기였다. 총 정치부 주임이 대만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했다. 대륙에서 내로라했던 고위 장성과 원로당원들은 부친보다 더 지독한 장징궈의 개성을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온갖 이유 대며 미국이나 일본 여행을 신청했다.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출국하면 귀국은 거의 없었다.

문성서점 시절의 샤오멍넝과 주완젠 부부. [사진 김명호]

문성서점 시절의 샤오멍넝과 주완젠 부부. [사진 김명호]

국민당은 중국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자이며 ‘정통(正統)’과 ‘도통(道統)’의 상징을 자임한 지 오래였다. 당 혁신운동 마치자 대만을 공산당이 말살시킨 ‘민족문화 부흥기지’로 설정했다. 당과 군정치부, 정부기관이 운영하는 대형 출판기구와 언론기관들이 반공(反共)과 국학(國學) 관련 서적 출간에 열을 올렸다. 대만 청년들을 중국 고전과 반공서적에 매몰시켰다.

정보기관 총괄 장징궈, 부친보다 지독

잡지 ‘문성’ 주간 리아오는 두 번 감옥 밥을 먹었다. 1980년 대 초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리아오. [사진 김명호]

잡지 ‘문성’ 주간 리아오는 두 번 감옥 밥을 먹었다. 1980년 대 초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리아오.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가 기승을 부리던 1952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의 아들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이 부인 주완젠(朱婉堅·주완견)의 권유로 일을 벌였다. 타이베이 중심가에 서점을 열었다. 대시인이며 대서예가인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친필휘호, ‘문성서점(文星書店)’ 4자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문성서점은 서구 유명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을 영인(影印)하고 번역해서 출시했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서점은 문전성시였다. 영어문화권에 갈증을 느낀 대만 청년들은 12시간 자리 지키는 주완젠의 친절에 감복했다. 학창시절 문성서점 단골이었던 노작가가 서점풍경을 구술로 남겼다. “서점에 갈 때마다 친구에게 분명히 있다고 들은 책이 없을까 조마조마했다. 주완젠은 품위 넘치는 이웃집 누님 같았다. 여러 권 들고 온 계산대에서 돈이 모자라 우물쭈물하면 씩 웃으며 책을 포장해 줬다. 같은 경험한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 여사는 서점에 만족하지 않았다. 개점 5년이 지나자 남편에게 잡지 출간을 제의했다. 언론계의 대부였다는 시아버지는 물론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살벌했던 백색공포시대에 선보인 한 권의 잡지가 대만의 젊은 지식인과 중화권을 들썩거리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957년 11월 5일 문성서점이 잡지 ‘문성(文星)’을 선보이자 청년들은 환호했다. 생활, 문학, 예술을 표방하며 경총(경비 총사령부)이나 보안처에 개처럼 끌려가 숨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얻어터지거나  행방불명되기 딱 좋은 구호를 내걸었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문성’ 사장 샤오멍넝은 사업자금이 풍부하고 백이 좋았다. 정보기관도 샤오 부자(父子)의 성품을 잘 알았다.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예상이 적중했다. ‘문성’은 4년간 48권을 내면서 독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61년 겨울 샤오멍넝은 새로운 주간을 물색했다. 한 편의 글로 대만과 홍콩을 떠들썩하게 만든 31세의 리아오(李敖·이오)를 주간으로 영입했다. ‘문성시대’가 열리고도 남을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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