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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시대 대만 ‘기재’ 리아오, 언론탄압 맹공 곡절 겪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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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8〉

하얼빈을 뒤로한 후 베이징에서 한자리에 모인 리아오(앞줄 왼쪽 모친 무릎) 일가. [사진 김명호]

하얼빈을 뒤로한 후 베이징에서 한자리에 모인 리아오(앞줄 왼쪽 모친 무릎) 일가. [사진 김명호]

2018년 3월 기재(奇才) 리아오(李敖·이오)가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만은 물론 대륙과 홍콩, 화교사회의 매체들이 요란을 떨었다. 원로 언론인의 추도사 비슷한 글 일부를 소개한다. “고교 시절, 전통 복장에 파카 만년필 꼽은 리아오라는 단정한 대학생이 학계와 사상계의 거목 후스(胡適·호적)와 치고받은 논쟁 내용 읽고 충격이 컸다. 꿈속에 그리던 미래의 영웅이 분명하다고 의심치 않았다.”

이 미래 영웅의 삶은 곡절투성이였다. 위대한 잡지 ‘문성(文星)’을 주관하며 소송이 그치지 않았다. 법정 출석만도 700회 이상을 기록했다. 강호(江湖)에서 퇴출당한 후에도 분주했다. 거리에서 국수 팔고, 전기수리공 하다 비 오는 날 전봇대에서 떨어지고, 사상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출옥 후 강호에 복귀했다가 또 감옥에 갔다. 친구도 많고, 적도 많고, 여자 친구는 더 많았다. 동거한 여인도 7명이 넘고, 오밤중에 잠옷 바람으로 들이닥친 중화권 최고의 여배우 후인멍(胡茵夢·호인몽)과 결혼 100일 만에 이혼하고, 격조 넘치는 언사로 당권자(黨權者)들과 투쟁하고, 거대한 언론기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원고를 생산했다. 소위 명기자라 껍죽대던 사람들을 속으로 주눅 들게 만든, 대만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만약 리아오가 없었다면 계엄령시대의 대만은 너무 적막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 고전 두루 섭렵

문성서점과 잡지 문성을 창간한 샤오멍넝과 부친 샤오통즈(蕭同玆). [사진 김명호]

문성서점과 잡지 문성을 창간한 샤오멍넝과 부친 샤오통즈(蕭同玆).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1935년 하얼빈(哈爾賓)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마적, 경찰, 시골 훈장, 이발사, 목욕탕 주인 등 직업이 다양했다. 부친은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국어교사였다. 1936년 가을 돌쟁이 아들 품에 안고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부친 덕에 베이징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리는 국·공전쟁 막바지였던 1948년 가을 명문 ‘제4중학’에 수석합격했지만 전란을 피해 상하이의 중학으로 전학했다. 상하이의 중학 생활도 짧았다. 4개월 만에 상하이를 떠나 대만에 뿌리를 내렸다.

대만대학 사학과 재학시절의 리아오. [사진 김명호]

대만대학 사학과 재학시절의 리아오.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소학(초등학교) 시절부터 독서가 몸에 뱄다. 사탕보다 책을 좋아했다. 용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갔다. 소학 6학년 때 “나 혼자만의 도서관을 갖고 싶다”고 해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교장이 최근에 읽은 책을 물었다. 대답이 거침없었다. “현재 ‘손중산전서(孫中山全書)’와 ‘나의 투쟁’을 읽는 중이다. 잡지는 ‘관찰(觀察)’이 좋고 신문은 ‘신화일보(新華日報)’가 볼 만하니 선생님도 꼭 보도록 해라.” 1949년 4월 대륙을 떠날 때 14세 소년 리아오는 자신의 장서 500여권을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짐을 줄이라는 가족들의 불만은 귀에 담지도 않았다.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에서 중학 생활 시작한 리아오는 살맛이 났다. 도서관에 없는 책이 없었다. 사서를 자청하며 4년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잡지에 ‘존 듀이의 교육사상’을 가명으로 기고했다. 듀이가 제창한 ‘진보적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국민당의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제도에 반감 드러낸 글로 교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교육부는 기겁했다. 대만 전역의 교사를 상대로 필자 색출에 나섰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

결혼증서 받고 즐거워하는 리아오와 후인멍. [사진 김명호]

결혼증서 받고 즐거워하는 리아오와 후인멍. [사진 김명호]

고등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낀 리아오는 3학년이 되자 결단을 내렸다. 개학 10일 만에 학교를 때려치웠다. 융통성 많은 교장이 한숨 내쉬며 리아오를 격려했다. “훗날, 중국이 배출한 인재를 퇴학처리했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다. 1년간 하고 싶은 일 하다 대학에 진학해라.” 1년 후 리아오는 대만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다녀보니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술자 양성소와 별 차이 없었다. 학생이건 교수건 실망이 컸다. 걷어치우고 이듬해 가을 중문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다녀 보니 특이한 학과였다. 교수들은 대륙 명문대학 교수 시절과 달랐다. 애주가는 술꾼으로, 미식가는 탐식가로 변해 있었다. 학생들도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조교 3명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담배 물면 교수란 사람이 불 붙여 주고 가관이었다. 미모가 학생 선발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니기 싫었다. 대만대학은 전과제도가 없었다. 자퇴하고 사학과에 들어갔다. 사학과는 체질에 맞았다. 느슨해진 학계의 대가와 국민당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문자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한, 성질 급한 청년의 글이다 보니 특징이 있었다. 누구나 읽기 쉬운 평이한 문체로, 있었던 사실을 품위 있고 코믹하게 비판했다. 독자가 솜사탕처럼 불어났다.

1961년 막바지 문성서점(文星書店) 주인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과 주완젠(朱婉堅·주완견) 부부가 지지부진하던 잡지 ‘문성(文星)’의 주간으로 리아오를 초빙했다. ‘이겨도 한니발, 져도 한니발’인 것처럼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였다. 후스와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의 영향을 받은 리아오는 전반서화(全般西化)의 신봉자였다. 샤오멍넝, 주완젠과 철의 삼각을 형성하며 국민당의 내로라하는 정론가(政論家)들을 링으로 유인했다. 지저분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으며 벌린 ‘중서문화논전(中西文化論戰)’을 통해 공개적으로 국민당의 언론탄압을 맹공했다. 논전은 리아오와 문성의 압승이었다. 국민당은 리아오화 문성에 실린 글들이 법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무기한 정간조치했다. 문성서점도 폐쇄시켰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철창에서 만난 샤오멍넝과 리아오의 행동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샤오는 억울하다며 울기만 했다. 리아오는 “문성시대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일은 잊으라”며 이 악물고 웃기를 반복했다. 리아오 관련 서적과 연구논문 쏟아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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