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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77대 직계종손 쿵더청의 생모, 포악한 학대 시달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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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9〉

공자의 76대 종손, 30대 연성공 쿵링이의 중년시절 모습. 쿵링이에게는 타오원푸 등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공자의 76대 종손, 30대 연성공 쿵링이의 중년시절 모습. 쿵링이에게는 타오원푸 등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2008년 10월 전 고시원장(考試院長) 쿵더청(孔德成·공덕성)이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자(孔子)의 77대 직계종손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31대 ‘연성공(衍聖公)’과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역임한 인물의 죽음이었다. 2000여년간 이어온 ‘천하제일 가문’의 살벌하고 비극적인 과거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출생, 독살당한 생모와 누님의 비극, 3공(三孔)이라 일컫던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의 황당한 규모, 전국에 산재했던 엄청난 토지는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얘기는 한(漢)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35년 한무제가 “백가를 몰아내고 유술(儒術)만 받들자”는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유학(儒學)이 정통 지위를 확보하자 세상 떠난 공자가 344년 만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공자사상이 스스로 성군이라 자임하는 전제군주의 비위에 딱 맞았다. 공자 추앙 운동이 벌어졌다. 역대 제왕들이 각종 시호를 안겨 줬다. 당(唐)대에는 문(文)이 성했다. ‘문성왕(文宣王)’이라는 시호와 함께 성인(聖人)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몽골족 통치시절인 원(元)대에는 문선왕 앞에 ‘지성(至聖)’ 두 자를 첨가했다. 원을 몰아내고 한족 정권을 부활시킨 명(明) 왕조는 ‘대성지성선사’를 더했다. 청(淸) 왕조는 한술 더 떴다. 공자의 5대조까지 왕으로 추서했다.

30대 연성공 쿵링이는 부인 네 명

공부의 마지막 실력자 타오원푸. 서태후는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타오를 총애했다. [사진 김명호]

공부의 마지막 실력자 타오원푸. 서태후는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타오를 총애했다. [사진 김명호]

제왕들의 공자 후손 지원은 송(宋) 인종(仁宗)때 극에 달했다. 46대 손 공종원(孔宗願)을 초대 연성공에 봉하며 세습을 인정했다. 명·청(明·淸) 양 대에 1품관으로 승격한 연성공은 문신의 으뜸이었다. 황실 어도(御道)에서 황제와 나란히 걷고, 자금성(紫禁城) 안에서 말을 탈 수 있었다. 황제와 함께 국학(國學)의 학무를 시찰하고, 베이징에 올 때는 공묘에 배향된 제현(諸賢)과 맹자, 안자, 증자, 자사의 후예, 세습관직인 5경박사(五經博士)의 자손 120여명이 수행했다.

연성공의 가정집인 공부는 나날이 확장됐다. 대문은 황재 11명의 19차례에 걸친 순행(巡幸)과 공자의 제사 때만 13발의 예포와 함께 열렸다. 면적은 3공 중 가장 좁았다. 쿵더청이 태어난 1920년 2월 무렵 4만4000평 정도였다. 대성전(大聖殿)이 있는 공묘는 6만6000평의 면적에 비석이 숲을 이루고 고목이 하늘을 찔렀다. 공자와 후손들의 묘지인 공림은 중국 최대 규모의 공원묘지였다. 총면적이 66만 평에 달했다. 공묘와 공림의 관리권은 공부에 있었다.

동년시절의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 그는 공자의 77대 직계종손이다. [사진 김명호]

동년시절의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 그는 공자의 77대 직계종손이다. [사진 김명호]

연성공은 베이징에도 황제가 하사한 관저를 가지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없었지만 ‘베이징 주재 성공부(聖孔府)’라고 불렀다. 규모는 왕부(王府)와 비슷했다. 공자 제사에 쓰라고 하사받은 농지도 엄청났다. 청나라가 번성했을 무렵 전국에 약 2억 평, 소작인만 60만 명을 웃돌았다. 황제가 준 땅은 매매가 불가능했다. 매매가 가능한 사전(私田)은 200만 평 정도였다. 공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면세와 감세 혜택을 받은 토지 8000만 평(여의도의 약 130배 정도)도 연성공의 사유지나 다름없었다.

공부는 독단적인 규정이 많았다. 부녀자 속박이 엄중했다. 여자는 사묘(寺廟)에 참배할 수 없고 일부종사와 시궁창 같은 남편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이 기본이었다. 수많은 비극을 연출했다. 공씨 집안으로 시집오게 된 공자의 수제자 집안 딸이 있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숨소리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청년이 세상을 떠나자 17살짜리 여자애도 남편 따라 가겠다며 목을 맸다. 약혼 후 남자가 죽자 위패를 품에 안은 채 꽃가마 타고 신랑 집으로 간 신부도 있었다. 하늘과 땅에 절하고 신방에 들어가 신부복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죽을 때까지 수절하며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공림은 이런 괴짜들이 생길 때 마다 정절을 기리는 패방(牌坊)을 세웠다.

결혼 전 청년 숨지자 예비신부 목매

공부의 구석에 있던 쿵더청의 생모 왕바오추이의 거처. 희미한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다. [사진 김명호]

공부의 구석에 있던 쿵더청의 생모 왕바오추이의 거처. 희미한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다. [사진 김명호]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생모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쿵더청의 생부인 30대 연성공 쿵링이(孔令貽·공령이)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전처 쑨(孫)씨는 병사하고 첩 펑(豊)씨는 애를 낳지 못했다. 다시 들인 후처 타오원푸(陶文譜·도문보)는 아들을 낳았으나 세 살 때 죽었다. 쿵링이는 첩 왕바오추이(王寶翠·왕보취)에게 기대를 걸었다. 빈농의 딸이었던 바오추이는 어릴 때 타오 집안에 하녀로 팔려 갔다. 열일곱 살 때 원푸의 남동생 두 명이 바오추이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모친이 친정에 와 있던 원푸에게 바오추이를 공부에 데려가라고 권했다. 원푸는 남편 쿵링이가 바오추이를 첩으로 삼자 원푸의 포악한 학대가 시작됐다. 눈만 뜨면 바오추이를 발가벗겨 놓고 가죽 채찍으로 때렸다. 임신기간에도 채찍질은 그치지 않았다. 딸 두 명이 태어났다.

신문화 운동으로 공자 타도 운동이 맹위를 떨칠 때였다. 연성공을 세습할 아들이 없는 쿵링이는 불안했다. 공자의 후예들 간에 암투가 시작됐다. 바오추이의 태중에 아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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