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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그릇상가 5년 경력에 인류학·과학·문학을 꿴 '주방의 역사'[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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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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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로 보는 주방 오디세이

장원철 지음
글항아리

이 책은 우선 역사책이다. 출판사도 이 책을 역사, 그중에서도 테마사로 분류했다. 이 대목을 한번 보자. '왕실의 제사는 한 해 평균 170여 차례, 많게는 347건이었다. 이렇게 제사가 많았지만 제사 음식에 여자의 손이 닿는 것은 법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영조42년(1766) 8월 영의정 홍봉한이 아뢴다.'(99쪽)

올해 5월 7일 오후 종묘 영녕전에서 종묘대제가 열리고 있다.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올해 5월 7일 오후 종묘 영녕전에서 종묘대제가 열리고 있다.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런가 하면 인문 책, 특히 인류학 책이다. 이 대목을 보자. '지금도 수렵채집생활을 하는 부족민의 평균 출산 간격은 3.6년이다. 반면 현대인의 평균 출산 간격은 2.1년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구석기인의 출산 간격을 4년으로 추정한다.'(125쪽)

이 대목은 어떤가. 영락없는 과학책이다. '수소 원자 2개는 각각 하나 값의 양전하를, 산소 원자 하나는 두 개 값의 음전하를 갖는다. 이들은 나침반 바늘이 지구의 자기장에 따라 늘어서는 것처럼 전기장의 방향에 따라 늘어설 수 있다.'(193쪽)

마지막으로 이 대목을 한번 보자.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72쪽) 신기섭의 시 '나무도마' 중 일부다. 이 책은 이처럼 다양한 장르로 읽을 수 있다.

올해 3월 9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23 부산건축인테리어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원목으로 만든 다양한 도마를 살펴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올해 3월 9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23 부산건축인테리어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원목으로 만든 다양한 도마를 살펴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젓가락·칼·도마·냄비·프라이팬·가열도구·냉장고·각종 그릇 등 주방 도구를 소재로, 출판사 소개를 빌자면 '부엌의 작은 역사'를 풀어낸 책이다. 역사라고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문, 과학, 심지어 문학까지 녹여 넣었다.

사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로는 별 기대할 게 없어 보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권의 자기계발서를 쓰거나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머리말에 들어서자 자기소개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나는 남대문 그릇도매상가에서 업소용 주방기물을 팔았다.' 책에는 이 경력이 물씬 묻어나는 대목이 많다. '(칼)날 각을 말할 때는 보통 한쪽 날, 편도만을 얘기한다. 이 날 각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칼의 종류와 기능이 달라진다.'(63쪽)

저자는 다양한 관련 자료와 연구를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책을 쓰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는데, 저자는 서 말의 구슬을 정말 잘 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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