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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30분 기다린 푸틴 “위성개발 돕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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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우주기지를 회담 장소로 정한 것은 탄약 등 무기와 핵·미사일 기술 거래를 시사하며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우주기지를 회담 장소로 정한 것은 탄약 등 무기와 핵·미사일 기술 거래를 시사하며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4년5개월 만에 만난 두 정상은 미국이 대북제재 결의 위반을 경고한 불법 무기와 핵·미사일 관련 기술 거래에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용할 포탄을 지원하고 러시아는 북한에 첨단 군사기술을 제공할 경우 수십 년간 이어진 유엔 주도 국제안보 체계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흔들릴 우려가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러시아는 주권 수호를 위해 성스러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면서 “북한은 러시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항상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지도부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대한 전폭적 지지이자,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겠다는 다짐으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과의 대리전으로 인식하는 러시아에 탄약이나 포탄 등 필요한 전쟁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한 발언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주기지 시설에 들어가기 전 ‘러시아가 북한의 인공위성 제작을 도울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라며 “북한 지도자는 로켓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그들은 우주를 개발하려 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양국 간 군사기술 협력 논의 가능성에 대해선 “서두르지 않고 모든 문제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시간은 많다”고 말했다. 우려했던 위성 기술의 대북 이전을 시사한 것이다.

크렘린궁은 이날 회담에 앞서 ‘무기 공급을 논의할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분야에서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감한 분야라는 포괄적 표현에는 군사협력 외에 대북제재를 위반하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자금 지원 등 다양한 비공개 거래가 포함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북·러 관계를 최중대시하는 것이 (북한의) 확고한 입장”이라며 연대 의지를 드러냈다.

김정은 “푸틴 결정 전폭지지”…유엔제재·NPT 무력화 우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둘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 정상회담에 앞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내 최신 로켓 ‘안가라’ 조립·시험동을 시찰하면서 브리핑을 듣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가 여기 온 이유”라며 북한의 우주 개발을 돕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둘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 정상회담에 앞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내 최신 로켓 ‘안가라’ 조립·시험동을 시찰하면서 브리핑을 듣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가 여기 온 이유”라며 북한의 우주 개발을 돕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또 “이번 회담이 양국 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혈맹인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북한에 거리를 두는 사이 북한은 핵·미사일 고도화와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 새 뒷배로 러시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올해가 북·러 수교 75주년이자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이라고 상기하고 “러시아는 북한을 최초로 인정한 국가”라며 “특별한 시기에 (회담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우리는 경제협력과 인도주의 문제, 지역 정세 등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며 회담 의제를 열거했다.

두 정상은 2012년부터 짓고 있는 최첨단 우주시설인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회담 장소로 택한 데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푸틴은 “이번에는 내가 약속한 대로 새로운 우주비행장인 보스토치니에서 만났다”고 했고, 김 위원장은 “우주 강국의 심장과도 같은 우주발사장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우주 강국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3시간 회담…러 “문서 서명은 없을 것”

이처럼 의기투합한 두 정상이 이심전심이라도 되는 듯 공개한 약속과 지지는 모두 국제 규범에 어긋나는 범법 행위다. 2009년 10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1718호 이후 모든 대북 결의는 북한의 무기 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도 당시 결의에 찬성했다. 외교 소식통은 “다른 제재 대상 국가나 제재를 지키지 않는 게 더 이득인 국가들은 김정은과 푸틴의 정상회담을 바라보며 ‘제재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라거나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도와주면 제재를 어겨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며 “그렇다면 국제 제재 체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러시아는 “필요하다면 우리는 북한 측과 대북 유엔 제재에 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대북제재 위반이나 무력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러가 강도 높은 군사협력 체제로 들어선다면 안전보장이사회 등 유엔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화와 관여를 통한 비핵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며 “평화와 제재·압박을 중심에 둔 대북정책이 한층 힘을 받고 강대강 대치 국면이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푸틴이 김 위원장이 원하는 핵 무력 관련 기술이나 핵잠수함 기술까지 이전한다면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 북·러 밀착을 통한 북한의 핵 무력 강화는 한·미·일과의 선명한 대결 구도로 이어지며 동북아는 물론 국제사회 전체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도 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정상회담은 양국 대표단이 배석한 확대 회담(1시간30분), 김정은과 푸틴의 일대일 단독 회담(30분) 등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공동 기자회견 없이 곧바로 만찬 일정에 들어갔다. 김 위원장은 만찬사에서 “우리는 러시아 군대와 인민이 패권과 팽창 야망을 추구하는 악의 무리들을 징벌하고 정의의 싸움에서 반드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악의 무리’는 미국을 비롯,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크렘린궁은 “정상회담 뒤 공동선언문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문서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국제사회 비판을 의식한 듯한 조치로 보인다.

전용 열차로 이동한 김정은은 오후 1시쯤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30분 먼저 도착한 푸틴은 김정은을 반갑게 맞으며 40초간 악수와 인사를 나눴다. 김 위원장은 방명록에 “첫 우주정복자들을 낳은 로씨야(러시아)의 영광은 불멸할 것이다”라고 썼다. 서방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러시아의 처지를 잘 드러낸다”며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이 이토록 귀한 존재가 된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두 정상은 우주기지 주요 시설을 함께 시찰했다. 러시아의 최신형 로켓인 ‘안가라’의 조립·시험동 및 발사단지, ‘소유스-2’ 로켓 발사시설, 건설 중인 안가라 발사단지 등을 둘러봤다. 김 위원장이 러시아 측 관계자에게 로켓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CNN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보스토치니 기지에서) 발사할 수 있는 가장 큰 로켓 추력은 얼마나 되나” “(로켓 직경이) 부품까지 포함하면 8m냐” 등 구체적으로 물었다. 김 위원장이 로켓 기술을 설명하는 디스플레이 앞에서 다소 흥분한 듯한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이날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북, 회담 1시간 전 탄도미사일 도발

북한은 이날 정상회담을 1시간여 앞두고 동해상을 향해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2발을 발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군이 오전 11시43분쯤부터 53분쯤까지 북한이 순안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발사한 단거리탄도미사일 2발을 포착했다”며 “미사일은 각각 650여㎞ 비행한 뒤 동해상에 탄착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탄도미사일 2발이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밖에 낙하한 것으로 보인다”며 “첫 번째 미사일은 비행거리가 약 350㎞에 최고 고도는 50㎞, 두 번째 미사일은 비행거리 약 650㎞에 최고고도 50㎞로 변칙 궤도로 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북한이 최고지도자가 국외에 있을 때 탄도미사일 도발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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