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개월 은둔의 묘미…"물질이 파괴한 인간성, 은사 삶으로 회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은둔의 미학』을 펴낸 이은윤 전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은 "은사 문화는 물질문명이 파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은둔의 미학』을 펴낸 이은윤 전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은 "은사 문화는 물질문명이 파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지난 2020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흔들었다. 만남을 자제하고 고독의 시간이 권장되던 그때, 이은윤(82) 전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은 충남 공주의 생가에서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면 기도하고, 정원에 딸린 밭에서 상추·쑥갓·아욱·근대·시금치 등을 길렀다. 마루에서 풍경을 즐기고, 밤이면 고전에 탐닉했다. 이렇게 보낸 약 1년 6개월을 원고지 1700매에 육필로 기록해 최근 책 『은둔의 미학』(민족사)으로 펴냈다. 그가 체득한 은거의 묘미는 무엇일까. 그를 지난 5일 만났다.

본지 종교전문기자였던 이 전 원장은 시골집에 '만학유거(萬壑幽居)'라는 옥호를 붙였다고 했다. 만학은 골짜기가 많았던 고향의 특징을 딴 자신의 호다. 유거는 은둔해 사는 거처를 뜻한다. 넓은 방 한 칸과 거실, 마루, 별채 황토방 주변에 참죽나무·잡감나무·소나무 등 각종 나무와 모란·철쭉 등이 그득한 곳이란다. 집터를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담도 대문도 필요 없는 집이다. 이 전 원장은 그곳에서의 삶을 '은거'로 표현했다. "은사(隱士)로서 사는 것을 뜻한다"며 "자연과 공존하며 자연의 운행과 질서를 스승으로 삼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의 생가에는 '만학유거'라는 글귀를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이은윤 제공

이 전 원장의 생가에는 '만학유거'라는 글귀를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이은윤 제공

은사란 무엇인가. 
본래 은둔해서 사는 선비를 뜻했다. 이들은 학식·교양을 갖췄지만 관직을 거부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관직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은거한 문인들로도 의미가 확장됐다. 오늘날엔 세속을 떠나지 않고도 세속을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지키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귀촌·귀농·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도 포함하는 것인가.
그렇다. 은사의 삶은 단순히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피세(避世)주의도, 입신양명을 꿈꾸는 입세(立世)주의도 아니다. 이 둘 사이쯤에서 노니는 삶, 유세(遊世)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속세에서 완전히 떠나 살 순 없지만, 마음으론 거리를 둘 수 있다. 즉 기본적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산수를 거닐며 사는 것이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뜻인가.
아무리 산속에 숨어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의미가 없다. 진나라 때 도연명은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이라고 했다. 세상 소음 속에 있더라도 마음이 고요하면 속세도 깨끗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정신적 삼림을 조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식주를 해결하고 시간을 내서 독서나 악기 연주, 자연 감상 등을 하는 것이다.
정원에는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가 쓴 글에서 따온 이름으로, 산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진 이은윤 제공

정원에는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가 쓴 글에서 따온 이름으로, 산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진 이은윤 제공

책에서 은사 문화를 강조했다.
은사 문화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독립적인 인격이다. 명예나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급 정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물질이 아닌 감성을 만족시키는 심미적 안목으로 세상과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다.
은사적 삶을 '초연'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했는데.
오늘날 스트레스라고 하는 번뇌는 분별과 집착에서 나온다. 인간은 상대적인 기준으로 성패·부귀·미추 등을 나누는 분별을 하고, 이때 소유하려는 집착이 생긴다. 이를 멈추는 것이 초연이다. 하루의 일은 자정까지 모두 떨어내고, 한 달의 일은 그달 말로 성패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전 원장은 은사적 삶이, 물질문명이 파괴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명사의 거대한 흐름을 거부할 순 없지만, 정신문명 생활로 균형을 잡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회복력을 외치는 시대에 생명애 의식, 자연과의 연대 등 은사들이 강조한 가치를 반추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