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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홍콩이 먼저 진가 알아챘다…젤리맨 신나게 노는 팝초현실주의 [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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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 넘치는 이야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팝초현실주의 작가.”
김복기 미술평론가가 작가 김명진을 정의한 말이다. ‘초현실주의’란 말을 붙일 만큼 그의 작품은 한 마디로 장르를 정의하기 힘들다. 배경은 동양화의 색감과 깊이감으로 그리지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그 안을 채우는 피사체는 화사한 색감이 있는 서양화로 그린다. 예를 들어 그가 최근 작품에서 즐겨 그리는 커다란 고래와 배경은 동양화에 기본을 둔 흰색·회색·검은색을 기본으로 한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고래 아래엔 알록달록한 색감의 캐릭터 ‘젤리맨’ ‘캔디걸’ ‘소시지맨’들이 신나게 논다. 동양화와 서양화, 그리고 일러스트의 융합 작업이다.

지난 8월 29일 김명진 작가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갤러리가이아에서 만났다. 우상조 기자

지난 8월 29일 김명진 작가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갤러리가이아에서 만났다. 우상조 기자

작업 방식 또한 그리기에 국한되지 않고, 마티에르·뿌리기 등 다양한 회화 기법을 사용한다. 이렇듯 형식을 파괴하고, 섞는 것은 김명진이 가장 잘하는 작업이다. 정규 미술 교육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오히려 고정관념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데로 그리고 싶은 데로 작업해나간다.

그림을 무엇이라 정의하나요. 

"처음엔 그림이 내 삶 그 자체라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치유받고 또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삶 속의 예술'이 아니라 '예술 속에 내 삶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의 방향을 보여주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하나의 우주랄까요."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⑦ #경쾌한 팝초현실주의 작가 김명진의 세계

김명진은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왔고, 군대 제대 후 일러스트 학원에 다닌 몇 달, 그리고 대구예술대학에 잠시 다닌 게 전부다. 하지만 그는 올해 키아프 서울에서 주목해 봐야 할 20인의 ‘하이라이트 작가’로 선정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다. 2016·2017년 키아프에선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작가로도 선정됐다. 해외에선 2016년 미국 마이애미 아트 위크에서 '50명의 꼭 봐야 하는 작가'에도 선정된 바 있다.

별다른 미술 교육 없이도 이렇듯 인정받는 작가가 된 것이 대단해요. 어떻게 작가가 됐나요.

"늘 그림을 그렸어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조그만 기계 제조회사에 들어갔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빨리 군대에 갔고 제대 후엔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생각에 일러스트 학원에 다니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시작했어요. 열심히 했더니 운 좋게도 일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 일을 발판으로 여기까지 왔네요. 하하."

젤리맨이 주인공이 된 신작 '엣지워커'. [사진 갤러리가이아]

젤리맨이 주인공이 된 신작 '엣지워커'. [사진 갤러리가이아]

캔디걸이 즐겁게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의 신작 '엣지워커'. [사진 갤러리가이아]

캔디걸이 즐겁게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의 신작 '엣지워커'. [사진 갤러리가이아]

독학으로 그린 그림, 자비로 시작한 전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김명진의 작가 인생은 그의 열정과 노력이 이뤄낸 결과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당시 지인에게 선물 받은 미국 팝아트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집이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에 "눈이 뒤집혔다"고 말할 정도로 큰 울림을 받은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곧장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러스트 일을 줄이며 작업에 몰두했다.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지금은 없어진 서울 인사동의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자비를 들여 한 개인전이 김명진의 데뷔 무대였다. 미술업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였기에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림에서부터 전시까지, 모두 독학이었네요.

"그림 그리는 법은 다른 작가들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따라 해보고 하면서 익혔어요. '이건 뭐예요'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며 배웠죠. 그런데 전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갤러리와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시스템에 대해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가나아트스페이스에 덜컥 대관 계약을 했어요. 지켜야 하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무모한 도전 같은 전시였지만, 이 전시로 인해 김명진은 지금까지 함께 하는 갤러리 가이아의 윤여선 대표를 만나게 됐다. 윤 대표는 "당시 그의 그림을 본 순간 단테의 신곡을 보는 것 같았다"고 소회했다. 갤러리에 걸린 100호짜리 연작 다섯 점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윤 대표는 그림을 모두 자신의 갤러리로 옮겨 다시 전시를 열어줬다.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 바로 김명진의 대표작이자 상징이 된 '엣지워커(Edgewalker)' 연작이다.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이란 뜻의 엣지워커 연작에 대해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김명진의 그림은 드로잉과 낙서, 일러스트의 경계가 지워져 있다"면서 "화면 전체를 비상한 기운과 흥미로 채우고 있으며, 날 것 그대로의 활기를 대담하게 보여준다"고 평했다. 2013년 시작한 엣지워커 연작은 미국 '휴스톤 아트 페어', 캐나다 '아트 토론토', 홍콩 '아시아 컨템포러리 아트 페어' 등 해외 유수 아트 페어에 출품하는 족족 팔려 나갔다. 그의 그림을 해외에서 먼저 알아봐 준 것이다.

젤리맨, 캔디걸 같은 캐릭터가 만화 같기도 해요.

"배경엔 무게감이 들어가지만, 캐릭터엔 이 시대의 상징성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산품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선명한 물건이나 음식을 모티프로 했어요. 또 많은 사람이 경험해본 것일수록 그림을 봤을 때 자기만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요. 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설사 어린아이라도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들길 바랐어요."

수묵화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기법으로 그려낸 회색 고래와 귀여운 캐릭터들이 담긴 작품 앞에서 김명진 작가가 포즈를 취했다. 우상조 기자

수묵화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기법으로 그려낸 회색 고래와 귀여운 캐릭터들이 담긴 작품 앞에서 김명진 작가가 포즈를 취했다. 우상조 기자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 속 캐릭터들의 크기가 점점 커져요. 이유가 있나요.

"저와 함께 자라나는 것 같아요. 고래도 처음엔 멸치만 했는데 지금은 덩치가 커졌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처음엔 조그만 씨앗처럼 그림에 들어갔는데, 그림과 제가 성장하면서 캐릭터들도 점점 커졌습니다."

이번 키아프 서울엔 신작이 나오나요. 

"맞습니다. 원래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작업하곤 하는데, 신작 준비로 최근엔 작업 시간을 1시간 더 늘려 오전 8시부터 시작하고 있어요. 작품을 많이 그리긴 했는데, 키아프엔 8점 정도 나가게 될 것 같아요. 관객들이 많이 봐주시면 좋겠고요, 제 그림을 통해 즐거운 '혼자만의 상상 이야기'에 빠지면 좋겠습니다."

작가 김명진은...

1978년생. 대구예술대학교. 2013년과 2016~2022년 갤러리 가이아에서 개인전 ‘엣지워커(Edgewalker)’와 2013년 가나아트스페이스 개인전을 열었다. 주요 국내 아트페어 및 단체전으로는 국내에선 키아프 서울과 아트 부산, 화랑미술제, 대구아트페어 등에 참가했다. 또한 아트 마이애미 콘텍스트(미국), 아트 센트럴(홍콩), 아트 스테이지(싱가포르), 휴스턴 파인 아트 페어(미국), 아트 토론토(캐나다), 아시아 컨템포러리 아트 쇼(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 유수 아트 페어에 출품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및 다수의 기업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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