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하이엔드] 이게 점이라고? 작가 이만나가 점 하나 하나로 그려낸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응집의 에너지. 작가 이만나의 그림에선 차분하게 꾹꾹 눌러 담은 듯한 힘이 느껴진다. 그의 그림은 언뜻 봤을 땐 빛바랜 사진 같기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아주 작은 점을 하나하나 겹겹이 찍어 만들어낸 점묘화다. 작업 시간은 작품을 크기를 떠나 한 점을 완성하기까지 3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 이만나의 시간과 노동의 결집체다.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④ #작가 이만나, 사라진 풍경에 아련함을 담다

지난 8월 20일 오전 경기 성남 상대원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만나 작가를 만났다. 장진영 기자

지난 8월 20일 오전 경기 성남 상대원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만나 작가를 만났다. 장진영 기자

지난 8월 21일 오전, 작업이 한창인 이만나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번 키아프 서울에 출품할 신작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붓과 팔레트가 옆에 놓여 있었다. 그는 "아직 반도 못했어요"라며 웃었지만, 그림은 이미 꽉 찬 에너지로 완성돼 보였다.

이만나는 일상에서 흔하게 만나는 풍경을 그리는 작가다. 많은 사람이 터널로 향하는 차 안에서, 도심 속 공원을 걷다가,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만든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져 더는 거기에 없는 풍경, 그것이 그의 작품이 된다. 2020년 금호터널 위로 보이는 철거 전 주택가 풍경과 철거 후 아무것도 없어진 모습을 그린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은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사라진 풍경을 즐겨 그리는 이유가 있나요.

“일상에서 만나는 공간들, 그런데 누구도 알아 봐주지 못했던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어떤 울림이 느껴져요. 모든 사물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생각과 맞아 떨어질 때 공명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내 그림이 되는 풍경들은 우연히 나에게 발견됐고, 또 내 마음과 맞아 떨어져 가슴을 울렸던 것들입니다.”

일상·비일상이 충돌하는 풍경을 포착

평론가 박영택은 그의 그림을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위치한 풍경”이라 평한 바 있다. 평론가의 말처럼 이만나는 젊은 시절부터 일상과 비일상이 충돌하는 풍경을 포착해 그림으로 그려냈다. 창을 통해 청명한 하늘이 보이는 깜깜한 독서실 안을 그려, 밝은 미래(비일상)를 위해 햇빛도 못 보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현실(일상)을 대비시켰다. 그는 “지금은 그런 충돌이 자연과 건물이 결합한 공간에서 보인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높은 산 위로 고개를 내민 건물의 모습이나 한강 너머로 보이는 한남동 같은 풍경이다.

이만나,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The Landscape that is no more There), 194 x 259cm, 캔버스에 오일, 2020

이만나,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The Landscape that is no more There), 194 x 259cm, 캔버스에 오일, 2020

이만나, 봄 성(Spring Castle 2), 150X181cm, 장지에 아크릴, 2018

이만나, 봄 성(Spring Castle 2), 150X181cm, 장지에 아크릴, 2018

대상이 되는 풍경은 어떻게 포착하나요.

"주로 일상에서 스쳐 지나갈 때 발견된 것이 큰 울림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풍경도 일상의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일상 속 익숙한 풍경이지만, 어떤 시간대나 빛, 기분 등에 따라서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있고 주로 그런 것이 포착되는 것 같아요."

그런 풍경을 발견하면 어떻게 기록하세요. 

"빨리 촬영해 놔요. 차 안에 있다면 잠시 신호에 걸렸을 때 한손으로 찰칵 빠르게 찍어요. 정성스럽게 찍진 않아요. 그렇다고 바로 그리는 것은 아니고, 사진첩에 넣어놨다가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야 그리게 돼요."

좋은 풍경을 찾아 여행이나 출사를 떠나는 작가들도 많은데요.

"작업을 위해 일부러 떠나진 않아요. 제 경우엔 감동이 웅장하거나 누구나 '멋지다'라고 말하는 풍경에선 오지 않더라고요. 물론 감동을 할 순 있지만 그리고 싶은 마음은 안 생겨요. 그러니까 미묘한 포인트가 있어요."

이만나, 강변1(Riverside 1), 24 x 41cm, 캔버스에 오일, 2020

이만나, 강변1(Riverside 1), 24 x 41cm, 캔버스에 오일, 2020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애착 

꾹꾹 붓을 눌러 점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 방식은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지켜주지 못해도 따듯한 시선이나마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을 담는다”는 그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이만나의 그림엔 아련함과 애처로움이 담겨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애잔한 감정이 느껴져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그래서 인 것 같아요.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것들이 저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울림이죠. 대표적인 게 인사동 뒷골목의 담벼락이었어요. 정말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담이었는데, 갑자기 우주를 대면한 것 같은 그런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느껴졌어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하는, 아슬아슬한 그런 감정이 있어요. 현기증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거기에 애잔함도 있죠. 눈길이 닫지 않는, 일반적인 시각에선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이 사라지고 나면 결국 추억이 되고 향수가 됩니다."

이만나, 벽16-1(The Wall 16-1), 130.3 x 162 cm, 캔버스에 오일, 2016. 지금은 없어진 서울 인사동 골목의 낡은 담을 그렸다. [사진 선화랑]

이만나, 벽16-1(The Wall 16-1), 130.3 x 162 cm, 캔버스에 오일, 2016. 지금은 없어진 서울 인사동 골목의 낡은 담을 그렸다. [사진 선화랑]

이만나 작가가 20일 오전 경기 성남 상대원동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만나 작가가 20일 오전 경기 성남 상대원동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마지막으로 예술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세요.

"사람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요. 먹고 살기 위한 문제에서 비켜나 있죠. 작가가 받은 감동을 다른 사람도 느끼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게 바로 예술이 가진 중요한 힘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만나는 이번 키아프 서울에서 연작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의 신작을 공개한다. 대상이 된 풍경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역삼2동을 잇는 매봉터널이다. 2020년 작보다 시선이 더 넓게 확장됐고, 최근 그의 작업에서 즐겨 사용하는 산 위로 고개를 내민 건물의 모습도 보인다.

작가 이만나는...

1971년생. 서울대 서양화과, 독일 브라운슈바익 조형예술대 디플롬·마이스터슐러 졸업.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2011~2013)와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작가(2014), 종근당 예술지상 ‘올해의 작가’(2014)로 선정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영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더 하이엔드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