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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이엔드] 콩·팥·벌레까지...모욕당한 것들을 그리는 작가, 정정엽

중앙일보

입력

멀리서 보니 달인데, 가까이서 보니 붉은 콩이 한 아름이다. 마치 축포가 터진 것처럼 화려한 무늬는 알록달록한 녹두와 완두, 붉은 팥의 조화다. 솜털 한 올 생생하게 표현된 기기묘묘한 벌레들이 화폭을 수놓는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갤러리 밈’에서 열린 정정엽 작가의 개인전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에서 발견한 장면들이다. 한 알 한 알 옹골차게 들어찬 콩과 팥, 녹두와 완두, 이름 모를 벌레들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②
작가 정정엽, 일상의 것들을 ‘유희 본능’으로 그리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정정엽 작가와 인터뷰했다. 작가 뒤로 보이는 작품은 '나의 묘한 벌레들(광목천위에 아크릴, 510x156cm, 2023)'. 김현동 기자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정정엽 작가와 인터뷰했다. 작가 뒤로 보이는 작품은 '나의 묘한 벌레들(광목천위에 아크릴, 510x156cm, 2023)'. 김현동 기자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정정엽 작가는 일상에서 발견한 미물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풀어놓는다. 매일 만나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평범한 소재들을 들여다보고 관찰한 결과다. 정 작가는 오는 9월 6~9일 열리는 ‘키아프 서울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및 발표한 ‘하이라이트 작가’ 중 한 명이다. 18일 갤러리밈에서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인터뷰했다.

자루 속 콩 한 알을 들여다보다

정정엽, 씨앗-땅 1, 2023, oil on canvas, 30x30cm

정정엽, 씨앗-땅 1, 2023, oil on canvas, 30x30cm

정정엽 작가의 그림에서 콩은 생명의 씨앗이며 움직이는 점이다. 작가는 콩을 한데 뭉치지 않고 온전한 한 알 한 알로 그린다. 둥근 콩은 굴러가며 무수한 점이 되고, 하나의 형상이 된다. 그래서 작품은 구상도 되고, 추상도 된다.

콩·팥 등 일상적 소재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흔히 보지만 누구도 그것의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 연작의 소재가 되는 곡물들이 다채로운 빛깔로 자루에 담겨 있는 모습이 어느 순간 눈에 들어왔다. 굉장히 우리다운 빛깔이면서도, 또 근원적인 생명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정엽, moon, 2008, 캔버스에 아크릴, 210x180cm

정정엽, moon, 2008, 캔버스에 아크릴, 210x180cm

심각하고 무겁지 않게, ‘놀이처럼’

무수히 많이 그려진 콩은 자연스레 부엌을 떠올리게 하고, 여성의 살림 노동을 연상시킨다. 미미하면서도 반복적이지만,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살림과 돌봄 노동이 마냥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작가가 그린 한 알 한 알의 콩은 멀리서 보면 ‘축포’ 같다. 마치 생은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

정정엽, 축제14, 2023, oil on canvas, 91x65cm

정정엽, 축제14, 2023, oil on canvas, 91x65cm

작업 시간이 꽤 길 것 같다.

손으로 하는 일이 모두 그렇듯 일정한 작업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콩류 연작의 경우 노동이 눈에 보이는 작업이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노동이 보이는 게 감사한 일이다. 열심히 수십 번 고쳐서 그렸는데 안 보이는 경우도 많으니. (웃음)

작업을 두고 ‘수행’ 같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심으면 생명이 되는 씨앗이니 한 알 한 알을 온전히 그리고 싶었다. 콩 한 알을 덧칠해서 채우는 게 아니라, 오일로 닦아내면서 그린다. 이 과정에서 리듬이 생기고, 그때 느껴지는 즐거움이 작업을 지속하게 만든다. 손으로 하는 모든 것에 유희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손의 노동이 노동으로만 지속했다면 계속하기 어려웠을 거다. 살림도 마찬가지고. 매일 해서 가족들을 먹일 때의 즐거움, 내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의 살아있는 기쁨을 표현했다.

정정엽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품은 '열린 벽1(acrylic and oil on canvas, 130 x194cm, 2022)'. 김현동 기자

정정엽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품은 '열린 벽1(acrylic and oil on canvas, 130 x194cm, 2022)'. 김현동 기자

콩이나 팥이 이렇게 예쁜 색이었나 싶다. 마치 폭죽 같은데.

실제로 콩을 보면 거의 모든 색을 가지고 있다. 검은색부터 흰색·연두색·붉은색 등 이 땅의 모든 빛깔을 가지고 있어서, 이걸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폭죽 같은 형태였다. 또 콩 한 알 한 알을 수확해야 만져볼 수 있으니, 노동에 대한 헌사이자, 축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았다.

난(蘭) 대신, 파(蔥)를 친다…. 살림의 사군자

‘살림의 사군자’는 정 작가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치던 난초 대신 파를 치고 양파 싹, 감자 싹을 그린다. 부엌에서 발견한 사군자인 셈이다. 봄나물 연작에서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달래의 조형성이 드러난다. 여성들이 매만지는 식물과 채소에서 발견한 미학적 단서다.

정정엽, 파, 2015, oil on canvas, 60.6x60.6cm

정정엽, 파, 2015, oil on canvas, 60.6x60.6cm

여성주의 대표 작가로 불린다.

아이를 낳고, 생명을 키웠던 삶의 궤적들이 자연스레 작업으로 발현됐다. 또한 아직 잘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기존에 남성의 눈으로만 봤던 세상을 여성의 눈으로 보자는 것은 다양한 관점의 확보라는 점에서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정정엽, 집사람1, 1991, 캔버스에 아크릴, 116x91cm

정정엽, 집사람1, 1991, 캔버스에 아크릴, 116x91cm

벌레에서 찾은 아름다움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린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에서는 생명에 대한 깊은 사고로 작품의 외연을 넓힌다.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나 징그럽고 낯설게 여겨지며 멸시당했던 벌레들의 기묘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면서다.

대체불가, 2023, 광목천위에 아크릴, 116.8x91cm

대체불가, 2023, 광목천위에 아크릴, 116.8x91cm

벌레나 나방은 또 다른 소재다.

벌레는 나도 예측하지 못했던 소재였다. 경기도 안성 미산리로 작업실을 옮기고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을 많이 만났다(웃음). 처음에는 그야말로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낯선 존재였는데, 관찰하고 들여다보니 제각각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모욕을 당한 자’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현대인들이 벌레를 볼 기회가 너무 없고, 모르기 때문에 혐오가 생기는 것 같다. ‘벌레 같은 놈’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나. 지금 생명이 위기에 처해있고, 사는 것 자체가 모욕당하고 있다. 또 발견하지 못한 곳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있을지 자각을 하고 나니 겸손한 마음도 생겼다. 나방도 없어지면 새 먹이가 없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존재다. 내가 모를 뿐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우리의 디테일도, 상상력도 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정정엽, 지구의 한 마을-나방1, 2014, oil on canvas, 162x130cm

정정엽, 지구의 한 마을-나방1, 2014, oil on canvas, 162x130cm

“예술도 일상에서 길어 올릴 수 있다”

정정엽 작가는 세상의 작은 존재들이 한바탕 어우러지며 생명의 환희를 내뿜는 장면을 기어코 포착해낸다. 축포를 터트리듯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오색 콩의 색의 향연과 한밤중 불빛에 모여든 온갖 벌레들과 나방들의 발산하는 생명의 소란스러움이 축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 나가고 싶은지.

우리가 매일 매만지고 먹고, 만나는 것들을 예술로 표현하거나 가지고 놀 순 없을까 고민한다. 예술은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고,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아기들이 콩 자루에 손을 넣어서 만지고 노는 감각에도, 여성들의 일상적 돌봄 노동에도 예술적 시각이 있다. 이런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예술과 결부시킬 것인지가 나의 화두다.

정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주제이자 전시명인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글자 옆에 섰다. 김현동 기자

정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주제이자 전시명인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 글자 옆에 섰다. 김현동 기자

작가 정정엽은...

1962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두렁’ ‘갯꽃’ ‘여성미술연구회’ ‘입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제 34회 이중섭미술상’(2022)과 ‘제4회 고암미술상’(2018)을 수상했다. 출판물로 『한국현대미술선 002 정정엽』(2018)과 『나의 작업실 변천사』(2018)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아르코미술관·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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