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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이엔드] 한국 아티스트 정직성이 포착한 '일상적 숭고의 순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①
작가 정직성, 삶의 고통을 아름답게 풀어내다

난 8월 21일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정직성 작가.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붓을 들었다. 우상조 기자

난 8월 21일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정직성 작가.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붓을 들었다. 우상조 기자

지난 8월 21일 방문한 작가 정직성의 작업실은 작업 중인 대형 캔버스와 오래된 자개 화장대로 가득 차 있었다. 무심하게 놓인 자개화장대와 과감한 붓질이 돋보이는 그의 서양화는 묘하게 어우러졌다. "안녕하세요, 제가 정직성입니다"라고 짧고 굵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지만, 수줍은 듯 웃는 눈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정직성’은 화가 박이소(1954~2004)가 생전 즐겨 불렀던 빌리 조엘의 노래 ‘어니스티(Honesty)’에서 영감을 받아 정한 작가명이다. 지금은 본명 정혜정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름이 됐다.

작가명이 독특해요. 정직성으로 이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2001년 박 선생님이 직접 개사해 부른 어니스티를 처음 듣고 어떤 울림을 받았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작가명으로 잠시 ‘빌려’ 열심히 작업한 뒤에 박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제 사연을 이야기하고 ‘돌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헌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름에 걸맞은 더 좋은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화가가 된 계기는요. 

"어린 시절 잠결에 엄마가 보시던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에 관한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 그의 그림은 괴기스러웠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그 매력에 꽂혀서 그때부터 화가가 되겠다고 정하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때 고야의 그림에 왜 그렇게 매료됐는지 계속 생각하는 중이긴 해요."

그림으로 승화시킨 고통

이번 키아프 서울에 출품하는 신작 '빗속의 능소화(Campsis Grandiflora in the Rain 202342~4, 80x200cm each, acrylic and oil on canvas)'와 정직성 작가. 2023 우상조 기자

이번 키아프 서울에 출품하는 신작 '빗속의 능소화(Campsis Grandiflora in the Rain 202342~4, 80x200cm each, acrylic and oil on canvas)'와 정직성 작가. 2023 우상조 기자

정직성의 그림엔 삶의 고통과 위로가 담겨있다. 경제적·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삶 속에서 그가 직접 마주했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만큼 정직성의 삶은 고단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작가’라는 그의 소개는 언뜻 듣기엔 편안한 인생길을 걸어온 듯 보이지만, 중학생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병을 얻은 아버지 밑에서 언니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갔다. 돈이 없어 43번이나 이사를 했고,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김밥 한 줄로 하루 식사를 해결하며 배가 고파 울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그는 “살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 하나로 공부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림은 당시 선화예술학교 미술 실기 강사였던 정원기 선생님의 도움으로 계속할 수 있었다. 1995년 그렇게 서울대 서양화과에 과수석으로 입학할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풀리는 듯싶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0대 중반 시작한 버팀목이 되어 줄 거라 기대했던 전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당시 탄생한 그림이 그의 이름을 알린 연작 ‘연립주택(2002)’이다. 연립주택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패턴처럼 그려진 연립주택의 그의 팍팍했던 삶을 보여준다. 이후 이혼과 2014년 지금 남편과의 재혼을 거치며 도시 풍경을 특유의 추상적인 기법으로 그린 작품 ‘공사장 추상’ ‘푸른 기계’ ‘기계’ 연작을 발표했다.

정직성, 연립 주택 Semidetached Houses : 200902, oil on canvas, 100x100cm, 2009

정직성, 연립 주택 Semidetached Houses : 200902, oil on canvas, 100x100cm, 2009

정직성, 202021, 202022, 202023, 각 160x48.5cm, 자개, 나무에 삼베, 옻칠 마감, 2020

정직성, 202021, 202022, 202023, 각 160x48.5cm, 자개, 나무에 삼베, 옻칠 마감, 2020

그는 팍팍한 삶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공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길 바란 것. 예술의 윤리적·영적 역할에 대한 신념이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고통을 담았다고 하기엔 우아하다. 화려한 색감과 역동적인 붓질에선 오히려 힘이 느껴진다. 2019년 ‘자개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자개를 소재로 사용한 작품들도 그렇다. 반짝이는 자개들이 무희의 옷자락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고통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고통을 표현한다고 하셨지만, 작품은 오히려 아름다워요.

“고통을 그린다 해도, 그림 자체가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 그림에서 자신이 처한 고통을 보고 공명하게 되길 바라고, 그래서 그림에서 무언가 ‘더 해내고 싶은 에너지’가 드러나길 원해요.

생활에서 찾은 '일상적 숭고의 순간'

신작 '수국 Hydrangea 202339, 80x200(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앞에 앉은 정직성 작가. 우상조 기자

신작 '수국 Hydrangea 202339, 80x200(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앞에 앉은 정직성 작가. 우상조 기자

이번 키아프 서울엔 ‘빗속의 버드나무’ ‘목련’ ‘해바리기’ 등 자연에서 그 위로의 순간을 찾은 20점의 신작을 출품한다. 마치 무거운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고운 사람처럼 움직이는 비 오는 날의 버드나무, 용의 기세가 느껴진 고가도로를 휙 하고 지나간 바람처럼 작품들엔 그가 담고 싶었다던 '일상적 숭고의 순간'이 담겨있다.

집에서 기계, 이번엔 자연으로 소재가 옮겨 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지금 사는 곳이 시골이라 자연을 주로 접하게 돼요. 힘들게 일상을 유지하지만, 그 일상이 힘들지만은 않게 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우연히 만난 일상과 자연의 모습에서 그걸 많이 발견했어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존재들이죠. 내가 처한 조건이나 공간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가지고, 그런 순간을 포착해 그 자연을 그렸어요. 그러면 같은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을 상기시킬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직성, 용 Dragon 202301, 130.3x193.9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정직성, 용 Dragon 202301, 130.3x193.9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정직성, 빗속의 버드나무 Willow In The Rain 202332_34, 200x240cm(each 200x80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정직성, 빗속의 버드나무 Willow In The Rain 202332_34, 200x240cm(each 200x80cm), acrylic and oil on canvas, 2023

늘 사회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셨는데요. 이번 그림엔 어떤 걸 담았나요.  

"최근 급변하는 기후로 인한 폭우, 범람, 가뭄, 산불 등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그릴지 고민 중입니다. 추상적, 함축적으로 표현하거나 한국적 상징 등을 회화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신작 '빗속의 버드나무'는 산불 등 재난 상황 속의 생명과 삶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 대상으로 초여름 폭우 속 버드나무를 그렸어요. 3개의 그림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삼면화 형식으로, 일상적인 상황 속의 숭고함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죠."

정직성은 지금을 '제한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내는 질적인 도약의 순간"이라고 명명했다. 끝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수도자 같아 보였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작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을 수 있는 품격, 그것을 예술로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 종교가 어떤 삶의 방향을 제시할 때 절제된 삶을 통해 자신을 수련한 수도사가 메신저가 된 것처럼 지금은 예술가인 제가 수련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작품)을 통해 '다른 종류의 삶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작가 정직성의 전시 일정

📌 전시 '워킹 앤 리빙(Working and Living)'= ~9월 2일, 4인전, 이배 갤러리
📌 전시 '낭만적 반사'=8월 24일~10월 12일, 4인전, 갤러리 시몬
📌 전시 '다이알로그, 더 마인드 맵(Dialogue, The mind map)= 8월 25일~9월 9일, 예비전속작가제도 우수 작가 그룹전(13인), 성수 플랜트란스
📌 전시 제10회 종근당 예술지상=9월 21일~10월 2일, 3인전, 서울세종문화회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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