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하이엔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담는다...사진가 박형근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형근, Last summer, 120x178cm, C print, 2009

박형근, Last summer, 120x178cm, C print, 2009

박형근 작가의 사진들은 어딘가 불편하다. 초록빛 싱그러운 숲이 아니라 음울하고 불온한 숲이 등장한다. 무참히 헝클어진 가지 사이로 자리한 연못은 비현실적으로 붉다.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붉은색 전선이 잔뜩 엉켜 뭉쳐진 사진은 마치 폐허 같다.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⑤ #작가 박형근, 현실 너머 풍경을 그려내다

사진은 흔히 ‘찍는다’고 표현한다. 판화를 찍듯 현실 세계를 그대로 찍어 낸다는 의미다. 박형근 작가는 사진을 찍는 대신 그리는 것 같다. 그래서 기록 매체인 사진의 속성을 뒤집어 문학적 매체로 만든다. 대체 언제·어디를 찍은 것인지 사진 속에 찍힌 것들이 실재하는 것인지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박형근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피엔씨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작가의 뒤로 보이는 작품은 제주 연작 중 '유동하는 지형(Fluidic topography,jeju-2, C print, 150x200cm,2022)'. 장진영 기자

박형근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피엔씨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작가의 뒤로 보이는 작품은 제주 연작 중 '유동하는 지형(Fluidic topography,jeju-2, C print, 150x200cm,2022)'. 장진영 기자

카메라를 잡은 지 30년. “작가로 가는 길은 다 잘됐지만, 그 외의 일들은 모두 실패했다”며 “이게 운명인가 싶다”는 박형근(50) 작가를 지난달 28일 서울 청담동 피앤씨 갤러리에서 만났다. 현실과 비현실의 이면을 포착, 단 한장의 사진으로 관람자를 현실 너머의 세계로 단숨에 끌어당기는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고정된 현실 대신, 진동하는 비현실 그린다

박형근, The electronic wires, 2005,125x100cm, C print

박형근, The electronic wires, 2005,125x100cm, C print

2004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대표작 ‘텐슬리스(tenseless)’는 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연작이다. 영어 단어인 ‘긴장감(tension)’과 ‘없다(less)’를 엮어 현실의 견고한 질서가 와해하는 순간을 그려낸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말라 비틀어진 식물이나, 죽은 새, 고인 물이나 불탄 나무 같은 것들이 주로 등장한다.

텐슬리스의 의미가 뭔가.
긴장감이 없다, 혹은 고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작품의 주제라기보다 사진을 다루는 나의 방법론에 가깝다. 사진이 가진 기록적 특성을 능동적으로 드러내 보겠다는 의지를 담는다.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게 아니라 의도를 넣어 장면을 구성하고 연출해 의미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다.  
그냥 찍는 게 아니라 연출한다는 건가.
장면의 밑그림을 그리고, 필요한 로케이션(장소)을 설정한다. 세트가 필요하면 만들기도 한다. 예전에는 철저하게 필름 카메라로 모든 것을 연출해서 만들었다면, 최근에는 디지털로 합성이나 색 보정도 한다. 초록색이나 붉은색을 다루더라도 강렬하게 쓰는 편이고, 보색 대비를 통해 극적인 연출을 한다. 색마다 적정 톤이라는 게 있는데, 강도와 세기를 적정 이상으로 올리기도 한다. 색은 언어보다 직관적으로 보는 사람의 심리를 흔든다.   
박형근, Swamp, 2004, 125x100cm,C print

박형근, Swamp, 2004, 125x100cm,C print

주로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찍는 이유는.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는 것을 통해 의심이나 불편한 감정 같은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시도다. 관람객들이 사진을 보고 상상이나 몽상을 했으면 한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입혀 완성하는 방식이다.  

셔터 누르는 순간 ‘감’ 온다

제주에서 태어난 박형근 작가는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대학에서 다큐멘터리·광고·예술 사진을 다방면으로 넘나들었다. 덜컥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나니 고민도 됐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후회가 없다”는 은사님의 조언에 힘을 얻었다.

1999년 첫 개인전을 열며 사진작가로 데뷔한 그는 2002년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데미안 허스트 등 걸출한 아티스트를 키워낸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순수 예술 분야에서 딱 20명을 뽑았는데, 유일한 사진 전공이자 동양인이었다고 한다. 입학 인터뷰 때, 그동안 작업했던 사진들을 이고 지고 가 큰 테이블에 깔다 못해 바닥까지 깔아 놓고 설명을 했다. 교수와 함께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설명하고 나니 ‘합격’의 예감이 들었다고.

박형근, Red hole, 75x100cm, C print, 2004

박형근, Red hole, 75x100cm, C print, 2004

2004년 졸업전시회 때 텐슬리스 연작 중 하나인 ‘레드 홀’을 처음으로 팔았다. 영국 주요 잡지에 인터뷰가 실리고, 개인전도 열었다. 35세의 나이에, 영국 주요 화랑들이 주목하는 작가가 됐다. 그러면서도 “작품을 팔기 위해 작업을 해본 적은 없다”며 투철한 작가 의식을 내비쳤다.

작업을 위해 어디를 주로 가는지.  
작업하기 위해 다닌다기보다, 언제 발산될지 모르는 결과물을 위한 보충이나 축적을 위해 다니는 것 같다. 워낙 자연을 좋아하니까 한번 괜찮다 싶은 장소는 몇 년을 두고 가서 반복적으로 본다.  
그렇게 계속 보다 보면 좋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나.  
길게는 1년 이상 반복적으로 어떤 장소와 호흡을 하다 보면 순간적인 특별함을 느낄 때가 온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감응하려고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바람이 바뀐다거나, 파도가 친다거나 할 때의 생생한 감정을 포착하려고 한다.  
셔터를 누를 때 ‘이건 되겠다’는 감이 오나.  
당연히 감이 온다. 예전에는 주로 필름카메라를 썼는데, 확인하지 못해도 이건 작업이 되겠다는 걸 알겠더라. 그러면 현상이 될 때까지 며칠 설레면서 기다린다. 물론 간혹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면서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알게 됐다. ‘아 그땐 분위기에 취했구나, 이성적이지 못했구나’하고. (웃음)
박형근, 두만강 프로젝트, TMRP.Yuejing -3, Digital C print, 120x150 cm, 2016

박형근, 두만강 프로젝트, TMRP.Yuejing -3, Digital C print, 120x150 cm, 2016

필름과 디지털 중 어떤 카메라를 좋아하나.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더 많이 쓰고, 디지털카메라도 필름 카메라처럼 쓴다. 찍고 바로 확인하는 식으로 하지 않고, 많이 찍지도 않는다. 좋은 한 컷이 나온다는 건 사실 기적 같은 일이다. 내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날씨·바람과 한 호흡이 되어야 나오는 결과물이다. 결국 도 닦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웃음)

제주에서 두만강, 이제는 ‘중중무진’으로

박형근, Tenseless-101,Jungjungmujin,140x288cm, C print, 2022

박형근, Tenseless-101,Jungjungmujin,140x288cm, C print, 2022

최근에는 내면의 세계를 주로 얘기했던 초기작에서 주변으로, 자연환경으로 작품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제주의 숲이나 시화 방조제와 간척지 사진들을 담으며 자연과 생태를 탐구하고, 비무장지대와 두만강 유역 등을 촬영해 역사적 장소가 주는 독특한 서사를 기록했다.

같은 텐슬리스 연작이라도 최근작인 ‘중중무진(重重無盡)’을 보면 그 작품 세계의 확장이 확연하다. 불교 용어인 중중무진은 ‘어떤 세계든지 그 속의 세계는 무진장 많고 깊다’는 의미를 지닌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동굴 사이 심연에 떠 있는 별빛은 태곳적 신비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박형근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피엔씨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박형근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피엔씨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중중무진’ 시리즈가 키아프 2023 출품작이다.  
존재나 현실 인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환경 문제로, 지금은 보다 초월적 세계에 관심이 간다. 코로나 19 영향도 있었고, 최근의 전 지구적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다. 작가가 하나의 세계를 향해서 쭉 나갈 때, 개인의 욕구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호흡하는 모습이 작품을 통해 나왔으면 한다. 시리즈 중 하나인 ‘신세계(new world)’라는 작품을 보면 거북이가 나오는데, 느릿느릿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꼭 나 같았다. 앞으로는 관계 회복이나 화해, 외부 세계와의 공생 같은 큰 이야기를 해나가고 싶다.
박형근, Tenseless-97,New world,120x154cm, C print, 2021

박형근, Tenseless-97,New world,120x154cm, C print, 2021

박형근 작가는...

1973년생. 영국 런던대학 골드스미스컬리지 시각미술대학원과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1990년대 후반부터 근대성, 영성, 공생 등의 주제를 탐색, ‘금단의 숲(2011)’ ‘텐슬리스(Tenseless·2004-2022)’ ‘제주도(2005-2022)’ 연작을 발표했다. 1999년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20여회 개인전을 열고, 18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금호영아티스트(2006), 제9회 다음작가상(2010), 프랑스포토케이레지던시 국제사진상(2014), 제12회 일우사진상 출판부문(2022)에 선정됐다. 박형근의 작품은 미국 휴스턴현대·조지이스트만 미술관, 프랑스 국립케브랑리 박물관, 영국 언스트 앤 영, 금호미술관, 일민미술관 등의 국내외에 소장되어있다.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