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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초크 안 썼다 "프리고진 대부 같은 결말"…충격 공개처형,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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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푸틴의 오른팔’로 불렸던 예브게니 프리고진(62) 바그너그룹 수장이 의문의 전용기 추락 사고로 숨지자 외신은 “크렘린궁이 ‘지연된 복수’를 실행해 결국 영화 ‘대부’와 같은 결말을 냈다”고 전했다. 영화 속 마피아가 상대를 죽이기 전 극적으로 용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듯,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무장 반란 사태를 일으킨 프리고진에 대한 처벌을 미루다 두달 만에 충격적인 ‘공개 처형’을 감행했단 의미다.

23일(현지시간) 친(親) 바그너 텔레그램 채널인 그레이존에 게시된 프리고진의 전용기 추락 현장. 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친(親) 바그너 텔레그램 채널인 그레이존에 게시된 프리고진의 전용기 추락 현장. 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항로 공개 사이트 플라이트트레이더24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프리고진 소유의 엠브라에르 레거시 제트기가 3만 피트(9144m) 상공까지 상승했다가 비행 30분이 채 안 돼 모스크바 근처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서 갑자기 추락했다. 러시아 항공청은 승무원 3명을 포함한 탑승객 10명이 전원 사망했다고 밝혔다. 인테르팍스통신은 시신 10구가 모두 수습됐으며, 유전자 분석을 통해 탑승객 신원을 확인 중이라고 전했다. 탑승객 명단엔 프리고진이 올라 있었고, 사고 현장에선 그의 휴대전화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사고" "고의 격추" 엇갈린 주장

사고 직후 친(親) 바그너 성향의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은 프리고진이 탑승한 비행기가 러시아군 방공망에 의해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날 사고 목격자들은 공중에서 두 번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고 전했다. 목격자들이 소셜미디어에 게재한 동영상에 미사일 흔적처럼 보이는 장면과 한쪽 날개가 없는 상태에서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비행기의 모습이 담겼다. 익명의 러시아 소식통은 러시아 언론에 프리고진의 전용기가 한개 이상의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됐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만약 프리고진의 비행기가 고의로 격추됐다면 이는 푸틴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 인물에 대한 공개처형”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 책임자인 키릴로 부다노프는 “지난 6월 (반란 사태 이후), 러시아 보안 기관인 FSB에 반란범을 암살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며 ‘고의 격추’라는 그레이존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일각에선 단순 사고라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모스크바와 그 주변 지역에 수차례 드론 공격을 감행하면서 해당 지역 방공망이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반면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방공망이 제트기를 드론으로 혼동할 가능성은 극히 작다”며 “드론은 더 느리고 작고 늦게 이동한다”고 사고 가능성을 일축했다. 로이터통신 역시 비행 추적 데이터를 인용해, 프리고진의 비행기가 추락 직전까지 아무런 결함이나 사고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아직까지 "수사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러시아의 수사관들이 프리고진 전용기가 추락한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의 수사관들이 프리고진 전용기가 추락한 트베리 지역 쿠젠키노 마을 근처에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반란 후 숙청' 본격화 주장도

추락 사고는 전날 러시아 군부의 실력자인 세르게이 수로비킨이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된지 하루 만에 발생했다. 수로비킨은 프리고진과 친밀한 사이로, 지난 6월 프리고진의 반란을 도왔거나 최소한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란 의심을 받아왔다. 수로비킨은 시리아에서 무자비한 폭격 전술로 ‘아마겟돈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우크라이나 작전을 총괄해온 군부 실력자다. 현재는 가택 연금 중이다.

수로비킨과 프리고진이 연달아 제거되자 푸틴 대통령의 ‘반란 후 숙청 작업’이 본격화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모스크바 사회경제대 정치철학과 교수인 그레고리 유딘은 “지난 두 달은 반란에 대한 크렘린궁의 내부 조사 기간이었다”면서 “조사 결과 수로비킨은 해고, 범인(프리고진)은 처형된 것”이라고 파이낸설타임스(FT)에 전했다. 유딘은 “만약 수로비킨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역시 추락한 비행기를 타고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비행기에는 프리고진의 오른팔이자 바그너그룹 지휘관인 드미트리 우트킨이 탑승해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민간 용병 기업인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가면을 판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민간 용병 기업인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가면을 판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반역은 곧 죽음" 러시아 엘리트에 경고

미국 소재 싱크탱크 대서양협의회는 “프리고진의 죽음은 푸틴 정권 유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푸틴 정권은 본질적으로 대중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운영되는데, 프리고진의 지난 6월 반란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면 정권 기반이 심각하게 약화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렘린궁의 고위 관리는 FT에 “반역죄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분명한 신호를 러시아 엘리트 전체를 향해 보낸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내년 선거를 앞두고 푸틴이 여전히 러시아에 강력한 통제권을 쥐고 있단 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려는 움직임이라고 WSJ은 분석했다.

이전에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이 대부분 노비초크 등으로 독살됐던 것과 달리 ‘비행기 격추’라는 이례적인 방식이 사용된 것도,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푸틴에 도전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란 분석도 나왔다. 다만 프리고진이 수사와 재판 등 법적 처벌 없이 죽음을 맞은 것은 국제사회에 러시아가 정상 국가가 아니며 푸틴 대통령 개인의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마피아같은 조직이란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투 승리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투 승리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戰 영향력은 미미할 것"

서방 전문가들은 프리고진의 죽음이 우크라이나 전황에 미칠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봤다. 바그너 그룹 용병은 이미 지난 5월 바흐무트 정복을 끝으로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 이미 주도권을 잃은 상태란 이유에서다. 지난 반란 이후 정치적 성향을 의심받으면서 후방으로 이동 배치됐다. 변수는 프리고진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바그너 관련자들이 돌발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군사 분석가인 로만 사폰코프는 자신의 텔레그램에 “프리고진의 죽음을 명령한 사람들은 군대 내부의 분위기와 사기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서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접경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투 승리 80주년 기념식에 참석 중이었다. 폴리티코는 푸틴 대통령이 사고에 대한 언급 없이 활짝 웃으며 개회사를 했다고 전했다.

한편 휴가차 네바다주 타호 호수에 머무르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놀랍지 않다”며 “일전에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무엇을 탈 때 항상 조심할 것’이라고 말했었다”고 발언했다. 푸틴 대통령이 배후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지만, 나는 충분히 알진 못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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