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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화링 모친 "제발 꽃·책 그만 사라" 인하이광에게 잔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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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6〉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열강하는 인하이광. 학생들 외에 교수들, 특히 여교수들이 많이 청강했다. [사진 김명호]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열강하는 인하이광. 학생들 외에 교수들, 특히 여교수들이 많이 청강했다.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책과 꽃을 생명처럼 여겼다. 이재에는 숙맥이었다. 대만대학 교수 월급과 원고료도 적지 않았지만 항상 빈털터리였다. 매일 아침 한집에 사는 ‘자유중국(自由中國)’ 동인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모친에게 콩국(豆奬) 사 먹을 돈을 빌렸다. “아침 먹을 돈이 없다. 원고료 나오면 갚겠다.” 녜의 모친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하며 돈을 내줬다. “인 선생아, 원고료 받으면 통째로 내게 맡겨라. 제발 꽃과 책은 그만 사라.” 같은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녜화링 모친 “인, 복잡하면서도 단순”

레이전 투옥 2년 후 초대 ‘자유중국’ 발행인 후스(왼쪽)는 중앙연구원 원장 재직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레이전 투옥 2년 후 초대 ‘자유중국’ 발행인 후스(왼쪽)는 중앙연구원 원장 재직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녜화링에게 소설을 쓰라고 권한 사람도 인하이광이었다. “너는 총명한 여자다. 남이 쓴 소설만 보지 말고 직접 써라.” 2003년 봄, 80세를 앞둔 녜화링이 반세기 전 타이베이의 골목에서 모친과 두 딸 데리고 절세의 자유주의 사상가와 한집에 살던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나는 너무 가난했다. 만년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먹물과 펜으로 만족했다. 하루는 인하이광이 원고료 탔다며 파카 만년필 사 들고 와서 모친에게 자랑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인하이광 바라보며 웃기만 하던 모친이 달래듯이 말했다. ‘이 사람아! 쓰던 만년필 두고 새것은 뭐 하러 샀느냐.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을 봐라. 진작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들이다. 비싼 만년필이 웬 말이냐?’ 인하이광은 줄 사람이 있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간 사용하던 파카 만년필 들고나와 내게 줬다. ‘오래 썼지만 소설 몇 권은 더 쓸 수 있다.’ 나는 대사상가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만년필을 받고 감동했다.”

‘자유중국’ 창간 시절의 레이전. [사진 김명호]

‘자유중국’ 창간 시절의 레이전. [사진 김명호]

이튿날 저녁 인하이광이 녜화링 모녀의 방을 노크했다. 좌불안석, 한동안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년필을 돌려줘도 되겠느냐?” 녜화링은 웃음이 나왔다. “원래 모두 네 만년필이다.” 인하이광은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다. “네게 줬으니 이젠 네 물건이다. 다시 달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만년필을 돌려받은 인하이광은 고맙다며 쎼쎼(謝謝)를 연발했다. 이어서 두 손으로 새로 산 만년필을 녜화링에게 선물했다. 옆에서 지켜본 녜화링의 모친은 어이가 없었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사람이다. 원래 너 주려고 산 만년필이다. 부담 덜어 주려고 저런 식으로 선물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당시 파카 만년필은 고가였다. 밀가루 15푸대 값과 비슷했다. 녜화링은 인하이광의 귀한 선물로 소설 6권을 썼다.

인 ‘언론자유 인식’ 글 덕에 체포 면해

연금시절의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연금시절의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과 녜화링의 모친은 서로를 아꼈다. 1951년 봄, 공군에 있던 녜화링의 남동생이 항공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녜화링은 모친에게 사실을 숨겼다. 영민한 모친이 아들의 사망을 모를 리 없었다. 인하이광은 졸지에 자식 잃은 여인은 돌아버리기 쉽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매일 황혼 무렵 밖에 나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자유중국’ 사택인근은 사방이 논밭이었다. 함께 산책하며 생사애락(生死哀樂)과 전란과 생활과 종교를 얘기하며 심리적 방어막 만들어 주기에 골몰했다. 6개월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1956년 샤쥔루(夏君璐·하군로)와 결혼한 인하이광은 대만대학 교수 숙소로 이사했다.

1960년 9월 4일 토요일 오전 9시 대만경비총사령부(警總)가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뢰진)과 직원 3명을 체포했다. 간첩불고지와 내란음모가 이유였다. 녜화링의 집도 압수수색을 피하지 못했다. 모녀는 인하이광의 안위를 우려했다. 신문만 오면 체포자 명단을 꼼꼼히 살폈다. 인하이광이 체포를 면한 이유는 1951년 ‘자유중국’에 발표한 ‘언론자유의 인식과 기본조건’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하늘이 부여한 천부(天賦)의 인권이다. 고대의 군주전제와 근대의 극권통치는 천부의 기본권리를 박탈했다. 언론의 자유 요구는 대역부도(大逆不道)나 마찬가지였다. 인간 사회의 수많은 비극은 입과 손끝에서 시작됐다. 언론자유의 본질은 특정된 내용과 목적이 필요 없다. 지금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혼란을 일으키고 종식시킬 수도 있는 도구로 변질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방종의 원동력은 지나친 열정과 사욕(私慾)이다. 자유는 다르다. 이성과 책임이 출발점이다. 방종과 혼합이 불가능하다.” 법치(法治)와 법률가의 자격도 한마디로 정의했다. “법은 말이 없다.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 법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 남발하는 사람은 법을 다룰 자격이 없다. 법을 통치의 도구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고지식하고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이 적합하다.”

젊은 나이에 10년간 ‘자유중국’ 문예란 담당했던 녜화링은 발행인 레이전과 주필 인하이광에게 받은 영향에서 평생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10년간 ‘자유중국’ 발행한 레이전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후스(胡適·호적)가 만인에게 건립 제의했던 동상은커녕 10년간 감옥 밥을 먹었다. 인하이광은 대학에서 쫓겨났다. 특무요원과 문화경찰의 감시받으며 연금생활 하다 나이 50에 백발이 된 채 세상을 뒤로했다. 마지막 외출이 녜화링 모친의 병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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