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쉬푸관 “후스 열등의식 결정체” 인하이광 “그 정도는 아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5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7〉

쉬푸관(오른쪽 둘째)은 육군소장 시절 장제스의 정보비서를 역임했다. 아이젠하워가 장제스의 후임으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총참모장 쑨리런(孫立人·오른쪽)과 가족 나들이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쉬푸관(오른쪽 둘째)은 육군소장 시절 장제스의 정보비서를 역임했다. 아이젠하워가 장제스의 후임으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총참모장 쑨리런(孫立人·오른쪽)과 가족 나들이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신해혁명 후 선보인 중화민국은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다. 줄여서 민국(民國)이라 불렀다. ‘민국시기’는 전통적인 농경문화와 서구문명의 충돌이 격렬했다. 국가와 국민을 덮친 재난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학계와 사상계도 혼란이 극에 달했던 춘추전국(春秋戰國)과 위진(魏晉)시대와 흡사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대학자와 사상가들이 줄을 이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화려하고 섬뜩한 문장과 언사(言辭)로 찬란함 뽐내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민국시대의 학자와 사상가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한결같이 학문의 독립과 자유만은 시종일관 견지했다. 자유를 만끽한 지식인들은 세계가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국민정부의 공이 컸다. 형편이 어려워도 교육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지출이 군비(軍費) 다음이었다. 지식인을 너무 존중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성격 때문이었다. 공산당 선전과 비호, 반대당 결성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전쟁시절에도 그랬고 대만으로 온 후에도 그랬다.

‘민국’ 지식인들, 학문 독립·자유 견지

인하이광과 샤쥔루의 결혼축하연에 참석한 녜화링(왼쪽 둘째)과 녜의 모친(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과 샤쥔루의 결혼축하연에 참석한 녜화링(왼쪽 둘째)과 녜의 모친(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최고 학술기관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식에 장제스가 참석했다. 공개석상에서 늘 하던 말로 끝을 맺었다. “중앙연구원도 정부의 통일대업에 힘써 주기 바란다.” 단상에 오른 원장 후스(胡適·호적)가 총통의 마지막 말에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방금 한 총통의 말은 틀렸다. 중앙연구원은 순수 학술기관이다. 독립과 자유를 견지하지 못하면 존립할 이유가 없다. 통일대업은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를 위해 복무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장제스는 속이 끓었다. 꾹 참았다.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후스가 무슨 말 하건 내버려 둬라. 나와 정부를 비판해도 맞서지 말고 듣기만 해라. 외부에 보여 줄 언론자유의 상징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항상 존경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작은 부탁은 다 들어줘라.”

1960년 가을, 한때 후스가 사장이었던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뢰진)의 체포와 ‘자유중국’ 봉쇄도 후가 없는 틈을 이용했다. 최측근인 비서장 장췬(張群·장군)에게 귓속말했다. “뉴욕타임스와 시사주간지 타임이 눈치챘다는 보고를 받았다. 레이 체포를 대서특필하면 미국 출장 중인 후스가 레이 구하겠다며 귀국할 것이 뻔하다.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재판을 빨리 끝내라. 미욱한 군 재판부가 사형 선고하지 못하도록 조치해라. 형량은 10년이 적당하다. ‘자유중국’ 주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학술사에 자리가 확고할 사람이다. 건드리지 마라. 대만대학 철학과 강의과목 없애고 월급은 평소처럼 지급해라. 후스가 나 면담 요청하면 시간 끌어라. 레이 얘기 꺼내지 않겠다는 확약 받은 후 수락해라. 그간 후스와는 독대만 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몇 명 배석시켜라.”

1945년 9월 충칭(重慶)에 도착한 중공 부주석 저우언라이(등 보이는 사람)를 영접 나온 레이전(오른쪽). [사진 김명호]

1945년 9월 충칭(重慶)에 도착한 중공 부주석 저우언라이(등 보이는 사람)를 영접 나온 레이전(오른쪽).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그래도 추종자들은 달랐다. 대만의 기재(奇才) 리아오(李敖·이오)에게 국민당의 문화특무(文化特務)라고 매도 당한, 중국 신유학(新儒學)의 대가 쉬푸관(徐復觀·서복관)이 후스를 맹폭했다. “후스 선생은 박사학위에 눈이 먼 사람이다. 선생보다 박사를 존칭으로 아는 분이니 그렇게 부르겠다. 후박사의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은 중국인의 치욕이며 동방인의 치욕이다. 내가 그러는 이유는 후박사가 문학, 사학, 철학, 중국을 제대로 모르고, 서구의 과거와 현대는 더 이해 못 하기 때문이 아니다. 후박사는 70년간 어느 학문이건 주변에도 제대로 접근해 본 적이 없다. 서구에 관한 얕은 지식과 영어로 유구한 전통문화에 대한 무지를 덮으려 하는 열등의식의 결정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후박사의 반론을 기대한다.” 후는 병 핑계로 대응을 피했다. 쉬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중국의 완전서구화를 주장하던 전반서화론(全盤西化論)자 인하이광이 쉬와 논쟁을 벌였다. 시작이 심상치 않았다. “언어가 너무 악독하다. 후스 원장이 그 정도는 아니다. 쉬의 편견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쉬가 발끈했다.

인, 미국에 있는 녜에게 저작권 선물

1958년 후스(오른쪽)의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식 참석차 연구원을 방문한 장제스. [사진 김명호]

1958년 후스(오른쪽)의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식 참석차 연구원을 방문한 장제스. [사진 김명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쉬푸관과 인하이광은 적이면서 친구였다. 쉬가 기라성들이 운집한 신유학의 상징이라면 인은 자유주의의 기수였다. 가치관도 달랐다. 쉬는 전형적인 전통주의자, 인은 신문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반전통주의자였다. 상대를 용납할 공간이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둘이 만나면 목청을 높이고 크게 웃기를 반복했다. 인이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모친에게 단언한 적이 있었다. “20년간 쉬를 혐오했지만 내가 아는 최상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접은 적이 없다. 내겐 가장 빼어난 감상의 대상이다. 반려자 샤쥔루(夏君璐·하군로)도 쉬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녜의 모친은 감동했다. 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인하이광은 열정과 용기로 충만한 이상주의자다. 원수 사이인 줄 알았던 쉬푸관을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있는 것 보고 놀랐다. 두 사람은 단순한 적대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친구며 적이다. 저토록 미묘한 인간관계는 처음 본다.”

녜화링은 모친 병문안 온 인하이광을 모질게 대했다. 인이 다시 오겠다고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오지 마라. 너와 병상의 모친이 마주한 모습 보면 너무 슬프다. 내 억장이 무너진다.” 인은 알겠다며 등을 돌렸다. 죽음이 임박하자 녜화링 모녀와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지혜로운 조강지처 샤쥔루와 주고받은 서신을 제외한 저서의 저작권을 미국에 있는 녜에게 선물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