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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총아 녜화링 “후스 싫다” 공항서 헌화 요청 거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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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5〉

‘자유중국’ 문예란을 총괄하던 시절 ‘자유중국’의 여류 작가들과 자리를 함께한 녜화링(가운데). [사진 김명호]

‘자유중국’ 문예란을 총괄하던 시절 ‘자유중국’의 여류 작가들과 자리를 함께한 녜화링(가운데). [사진 김명호]

먼 옛날부터 인간은 유희(遊戱)를 좋아했다. 구경은 더 즐겼다. 세월이 흐를수록 정치도 한 편의 유희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치무대에서 명 연기 뽐내는 인물들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자유와 민주의 상징이라 추앙하던 후스(胡適·호적)는 명연기자였다. 등 떠밀고 여차하면 뒤로 빠지는 재주에 능했다. 믿고 있다 골탕 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1949년 봄 후스는 대륙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상하이에서 미국 갈 기회 엿보던 중 국민당 중앙위원 레이전(雷震·뢰진)의 방문을 받았다. ‘자유와 민주’를 선전하는 간행물을 내자고 하자 입이 벌어졌다. 즉석에서 동의했다. “잡지 이름은 ‘자유중국(自由中國)’으로 하자. 발간사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작성하겠다.” 대만에 정착한 레이전은 ‘자유중국’을 창간했다. 발행인에 미국에 있는 후스의 이름을 올렸다. 창간호를 받아본 후스는 편집위원의 면면에 깜짝 놀랐다. 국민당 개혁파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버거웠다.

‘자유중국’ 3주년 창간 기념식 열어

타이베이 인하이광기념관의 서재 모습. [사진 김명호]

타이베이 인하이광기념관의 서재 모습. [사진 김명호]

‘자유중국’은 젊은 군인과 지식청년들을 열광시켰다. 독자투고가 줄을 이었다. 국민당 비판으로 통치권력과 충돌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창간 2년 후 일이 벌어졌다. 1951년 가을 고리대금업자들의 금융사건이 터졌다. 보안사령부가 함정을 파서 범인들을 체포했다. 인하이광을 위시한 편집위원들은 분노했다. “정부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며 정부를 맹폭했다. 보안사령부 부사령관 펑멍지(彭孟輯·팽맹집)는 보안사령부 실세였다. ‘자유중국’ 편집위원 체포를 지시했지만 대만성 주석을 겸한 사령관의 반대로 주저앉았다. 미국에 있던 후스는 불안했다. 레이전에게 묘한 편지를 보냈다. “범죄를 유발토록 한 정부를 비판한 옛 친구들의 글에 감동했다. 경의를 표한다. 군사기관의 언론 자유 간섭에 분노한다. 항의 표시로 발행인 직을 사직하겠다.”

인하이광(오른쪽)과 수제자 린위성(林毓生).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을 함께 번역했다.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오른쪽)과 수제자 린위성(林毓生).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을 함께 번역했다. [사진 김명호]

당시 대륙과 대만은 해외에 있는 명망가 영입에 열을 올렸다. 전 총통대리 리중런(李宗仁·이종인)과 우주과학자 첸쉐썬(錢學森·전학삼), 전 주미대사 후스의 향방이 주목을 끌었다. 1952년 11월 미국을 출발한 후스의 대만 도착은 국민당 지지를 의미했다. 정부와 척을 진 ‘자유중국’과의 관계 설정에 관심이 집중됐다. 인하이광 등 젊은 편집위원들은 후스를 믿지 않았다. “고통을 삼킬 줄 모르는, 양지만 찾아다닌 사람이다. 전쟁시절 중국에 있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여자와 명예학위 구걸에만 열중했다. 말로만 민주와 언론의 자유, 관용을 외치며 청년들을 험지로 떠밀었다. 정작 일이 터지면 미꾸라지로 돌변했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졌다. 대만 선택은 우리와 상관없다.” 레이전은 달랐다. 후스의 ‘자유중국’ 지지를 의심치 않았다. “후스는 누가 뭐래도 ‘자유중국’의 사장이다. 창간 3주년에 맞춰 대만으로 왔다.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녜화링(聶華笭·섭화령)에게 권했다. “후스가 여사의 글을 좋아한다. 공항에 나가 환영 화환 주도록 해라.” 녜화링은 후스가 싫었다. 레이전의 책상에 메모를 남겼다. “제게 헌화를 요청하셨습니다. 공항에서 벌어질 아름답고 열광적인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닙니다. 갈채의 중심에 함께할 자격이 없습니다. 헤아려 주시길 청합니다.”

“모 여인, 후스에게 반해” 소문 돌아

녜화링 모친의 학생시절. 인하이광은 부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안 들었다. 녜화링의 모친만은 예외였다. [사진 김명호]

녜화링 모친의 학생시절. 인하이광은 부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안 들었다. 녜화링의 모친만은 예외였다. [사진 김명호]

그날 밤 레이전은 후스와 ‘자유중국’ 동인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후스 만나느니 엄마와 윌리엄 홀든 나오는 영화 보러 가겠다는 녜화링을 인하이광이 달랬다. “후스는 ‘자유중국’의 호신부다. 부적 보러 가는 셈 치고 함께 가자. 헌화 거절은 잘했다. 유명 작가에게 헌화 권한 레이전의 고충을 이해해라.” 모친도 인하이광 편을 들었다. “윌리엄 홀든은 항상 우리 모녀를 기다린다. 다음에 보러 가자.”

후스의 대만 방문은 대형 사건이었다. 레이전의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쳤다. 문단의 총아로 자리 잡은‘자유중국’ 문예란 주임 녜화링이 나타나자 머리 굴리기에 분주했다. 다양한 소문이 퍼졌다. “후스가 대만에 온 이유는 단순하다. 좋아하는 여류작가 만나는 것이 주 목적이다.” 떠도는 말도 부지기수였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 “이름 밝히기 꺼려하는 여인이 후스에게 홀딱 반했다.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문 밖에서 기다리다 이동하는 곳으로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간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뜬소문의 피해를 입은 녜화링은 후스가 더 싫어졌다. 위로하는 인하이광에게 너 때문이라고 화를 냈다.

‘자유중국’이 후스 환영회와 창간 3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사회명사와 국민당 관료 100여명을 초청했다. 후스가 대만 도착 후 첫 번째 마이크를 잡았다. 레이전과 ‘자유중국’ 동인들을 추켜올렸다. “그간 레이 선생과 ‘자유중국’은 민주와 자유를 위해 분투했다. 대만인들은 선생의 동상을 건립해야 한다.” 박수가 요란했다. 이어서 엉뚱한 발언을 했다. “‘자유중국’ 잡지는 발행인에 내 이름을 사용했다. 국민당 원로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발행인을 환영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발행한 적이 없는 발행인이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수년간 발행인이라는 허명에 도취했다. 책임 지려해도 질 일이 없어 곤혹스럽다. 이제 허명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하이광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따라오는 녜화링에게 한마디 했다. “저거 꼭 저럴 줄 알았다.”

편집동인들은 ‘자유중국’의 진정한 영혼을 찾았다. 인하이광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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