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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의 힘보다 총의 힘으로 확산....근대 세계의 헌법 다시보기[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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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선, 펜
린다 콜리 지음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성문 헌법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기나 물 같은 자유재로 대접받는다. 희소성도 없고, 대가 없이 얻은 것이라 귀한 줄도 모른다.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지은이는 성문 헌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조문으로 구성된 헌법은 해당 국가의 내부 당사자는 물론 수많은 국가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경험이 축적돼 형성됐다고 강조한다. 특히 숱한 폭력과 전쟁이 성문 헌법이 제정‧개정되고 확산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한다.

1755년 코르시카의 민족주의 지도자 파올리가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만든 최초의 성문 헌법부터가 그렇다. 헌법 조문에는 ‘코르시카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국민의 의회’, ‘의회는 코르시카의 자유를 재정복하고, 국가의 복지를 보장하기에 적합한 헌법을 제정’, ‘정부에 항구적이고 지속 가능한 형태를 부과하려는 바람’ 등의 내용이 담겼다. 오늘날엔 지극히 당연시되는 공화제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삼권분립‧법치를 주장한 몽테스키외나 사회계약론‧인간평등을 앞세운 루소 등 18세기 계몽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파올리는 공화국 최고지도자인 ‘장군’으로 취임했으며, 무장한 시민이 국가를 방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를 마련했다. 독립국가의 생존을 위한 군사정치다. 이 헌법은 코르시카가 프랑스에 패배하고 합병된 1768년까지 적용됐다.

이달 중순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옛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연주하는 모습. 코르시카는 1768년 프랑스에 합병됐고,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AFP=연합뉴스]

이달 중순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옛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탄생 기념 행사에서 연주하는 모습. 코르시카는 1768년 프랑스에 합병됐고,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AFP=연합뉴스]

지은이는 1750년대 이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분란과 전쟁의 수준과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더 많은 세금과 병력이 필요한 각국 정부가 성문 헌법 제정과 수정에 나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 등 수많은 유럽 국가가 식민지를 팽창하고 서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면 총‧대포‧군함, 그리고 병력 등 군사력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선 국민 지지와 전쟁비용, 그리고 인력이 필요했다.

이들 국가는 국가의 최고‧기본 규범인 성문 헌법 제정과 수정을 통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모으고 재정적‧인적 수요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점령지와 식민지의 통치를 합법화하고 규율하는 데도 헌법을 적극 활용한 것은 물론 이를 널리 확산하고 다양화했다. 나폴레옹헌법 같은 성문 헌법은 국제무대에서 자국 위상을 선전하고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높은 세금과 징병을 수락한 대가로 선거권 같은 특정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이 소수의 세습귀족에서 다수의 일반시민에게 넘어가면서 ‘민주주의 확산’의 전기가 됐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1850년대 유럽‧아메리카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도 병역을 의무화하는 동시에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헌법이 공포됐다고 지적한다. 전쟁 수준이 더욱 가속화하면서 과세‧징병을 정치적 권력과 맞교환하는 수준도 증폭됐다는 분석이다. 이는 한편으로 20세기 초까지 참정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헌법에 매력을 느낀 것은 오스만튀르크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튀르크에서 술탄 압둘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폐지하고 근대화의 불을 붙인 1908년 청년튀르크당 혁명의 봉기 명분은 헌법 부활이었다. 반란 군인들은 술탄에 보낸 최후통첩에서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다”고 강조했다. 1876년 12월 공포되고 1878년 2월 술탄이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이유로 정지시킨 헌법은 이렇게 되살아났다.

튀르키에 국회에서 지난 6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 이후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튀르키에 국회에서 지난 6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 이후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이처럼 성문 헌법은 18세기 이후 여러 국가와 대륙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양한 정치적‧법적 제도의 형성과 재편은 물론 사고와 문화적 관행, 그리고 대중의 기대 유형을 변화시키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근대 정치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가 1908년 7월 오스만튀르크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에 도착해 청년튀르크당 혁명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캉유웨이는 1898년 6월 량치차오(梁啓超)‧탄시통(譚嗣同) 등과 함께 청나라 황제 광서제를 움직여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 등 무술변법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사회 개혁 운동은 104일 만에 무력을 앞세운 서태후와 위안스카이(袁世凱) 등 보수파의 무술정변으로 좌절됐다. 개혁과 헌법 제정을 가로막은 이 정변이야말로 중국을 오랫동안 세계사의 그늘에 가둔 거대한 독초가 아닐까.

지은이는 헌법이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이 창조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피조물’이라고 강조한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제정되고 개정됐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성문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효력을 내려면 지속적으로 정치적‧법률적 노력을 기울일 능력과 의향이 뒷받침돼야 하며, 필요할 때면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문 헌법은 조문이 아니라 이를 적용하며 관리하는 정치인‧법률가‧시민의 능력 한도 내에서 기능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울림을 준다. ‘전쟁과 헌법, 그리고 근대 세계의 형성’이라는 부제가 전체를 요약한다. 원제 The Gun, the Ship, and the Pen: Warfare, Constitutions,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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