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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이제 김대중 죽여도 시비할 놈 없다”…미국, 구명 나섰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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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13〉

‘사형수 김대중’. 1980년 5·17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나를 주범으로 엮었다. 그해 9월 1심인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 섰다. 어두운 감방에 갇혀 사형의 공포에 떨었다. 당시 사형은 실제로 집행됐다. “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이 솟구쳤다. 그래도 ‘저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 절망 속에 운명을 맡겼다. (※사형 집행은 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중단돼 현재에 이른다)

DJ 감형-전두환 방미 놓고 거래

1981년 1월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독서하는 장면. 2년 7개월의 옥중 생활 중 600권 정도를 읽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1년 1월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독서하는 장면. 2년 7개월의 옥중 생활 중 600권 정도를 읽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사형 확정 1시간 뒤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우방 국가들과 본인의 탄원 및 국민 화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감형을 의결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78년 7월~81년 6월 재임)가 훗날 전한 후일담이다. 허씨로 불리는 영관급 장교가 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제 김대중을 죽여도 시비할 놈이 없다”며 기뻐했다. 이 소리에 글라이스틴 대사는 기겁하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레이건 당선자 측이 깜짝 놀라며 지시했다.

“미국 정부가 진보에서 보수로 교체된다고 해서 외교·인권 정책까지 바뀐 건 아니다. 사형은 안 된다. 반체제 인사 김대중을 살려라.”

미국과 한국 정부는 나의 감형과 전두환의 방미를 놓고 ‘딜’을 했다. 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지만 정통성이 취약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했다. 레이건은 전두환의 미국 공식 방문과 정상회담을 수용하는 대신 ‘김대중 감형’을 조건으로 내걸어 타결했다. 미국이 내 목숨을 구했다.

감옥도 사람 사는 곳

청주교도소에서 한달에 한번 봉함엽서(편지지처럼 접을 수 있는 엽서)를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쓴 것이 눈에 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청주교도소에서 한달에 한번 봉함엽서(편지지처럼 접을 수 있는 엽서)를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쓴 것이 눈에 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무기징역의 기결수가 된 나는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80년 5월 17일 체포된 이후 석방될 때까지 2년 7개월 동안 철창에 홀로 고립됐다. 머리카락이 눈앞으로 뚝뚝 떨어지는 삭발의 수모를 당할 때는 마치 목이 잘린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다. 생존 본능이 발동하며 적응해 나갔다. 사색하고, 배우고, 성찰했다.

면회는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한 희망의 끈이었다. 가족으로 제한된 면회는 한 달에 한 번 10분에 불과했다. 쇠창살에 덧붙인 두꺼운 유리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 짧은 만남은 찰나처럼 흘렀다. 아내(이희호 여사)와 손 한번 맞잡을 수 없는 아픔을 뒤로 하고 헤어지면 곧바로 한 달 뒤 면회가 기다려졌다.

82년 1월 6일 내 생일에 아들들이 면회를 왔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유리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감방에 돌아와 애잔한 마음을 담아 시조를 지었다. 일부를 옮겨 본다.

‘면회실 마루 위에 세 자식이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 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아내여 서러워 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가족이 보고 싶다 벗들이 보고 싶다/ 강산도 보고 싶고 겨레도 보고 싶다/ 그렇다 종소리 퍼지는 날 얼싸안고 보리라’

“교도관님, 도와주세요” 아들의 호소

편지는 한 달에 한 번 가족에게 보낼 수 있었다. 봉함엽서(편지지처럼 접을 수 있는 엽서)만 허용됐다.

할 말은 많고 공간은 손바닥만 하니 글자를 작게 쓸 수밖에 없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썼다. 한 통을 쓰는 데 12시간 넘게 걸렸다. 한 통에 1만 자 이상 꽉 채웠다.

엽서에는 감옥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담았다. ‘존경하며 사랑하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자식들’로 시작하는 편지에서 나는 가족 사랑 등 개인적 소회뿐 아니라 신의 존재, 간디와 원효 등 내 머릿속 생각들을 글로 풀어냈다. 석방 때까지 모두 29통을 썼다. 예를 들자면 이런 내용이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내가 6대 국회의원이 되고서 신문에 ‘우리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으로서 현실 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고 말해서 자주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과 같이 양발을 원칙 위에 확고하게 딛고, 상인과 같이 양손은 자유자재로 방법을 구사하는 두 가지의 조화 있는 발전을 기해야 합니다.” (81년 6월 23일)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파악한 역사 철학이 많은 깨우침과 신념을 주었습니다.” (81년 7월 29일)

“공자는 ‘선을 선으로 대하고 악을 정의로 대하라’ 했으며, 부처는 ‘인내와 자비로 악을 대하라’ 했으며, 소크라테스는 ‘악을 악으로 대하면 정의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흥미 있고 교훈적인 비교입니다.” (81년 9월 30일)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한 후 이 지상의 운영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 이 세상 악의 압도적 다수가 인간의 책임에 속할 것입니다.” (82년 4월 26일)

장남 홍일이 보내온 편지는 지금도 아련하다. 홍일은 80년 5·17 때 체포된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1년이 지난 어느 봄날, 교도관이 “편지요!” 하고 주고 갔다. 발신인이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홍일이었다. 편지 뒷면엔 ‘교도관님, 제발 이 편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가도록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꿈속에서라도 만나 뵙고 싶어 애를 쓴 아버지, 아버지의 생명 지켜 주신 주님께 감사(…) 얼마나 가슴 졸이는 시간이었던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집니다.”

청주와 대전의 교도소에 각각 수감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애타게 찾고 걱정하는 기구한 신세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끝까지 편지를 읽을 수가 없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감옥을 고맙게 여긴 적 있다

전두환 11대 대통령이 제8차 개헌으로 출범한 제5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1981년 3월 3일 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

전두환 11대 대통령이 제8차 개헌으로 출범한 제5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1981년 3월 3일 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

감옥은 나의 대학이었다. 배움의 시간이었다.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등 다방면의 책 600권 정도를 섭렵했다. 책들은 주로 집에 보내는 편지에 책 제목을 적고 아내에게 부탁해 구했다.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변형윤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피터 드러커 『단절의 시대』, 애덤 스미스 『국부론』 등을 접하면서 감명과 영감을 얻었다.

문학 서적으로는 알베르 카뮈 『이방인』, 레프 톨스토이 『부활』 등을 읽었다. 『논어』 『맹자』 『사기』 등 동양 고전, 원효와 율곡에 대한 저서, 조선 말기의 실학 서적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책마다 하루에 20~30쪽을 정해 읽은 뒤 분야가 다른 책을 펼쳐 지루함을 피했다. 하루 10시간 정도 정독했다. 그날 읽은 분야에서 핵심이 무엇인지 머리에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게 됐다.

감옥을 고맙게 여긴 적이 있다. “내가 감옥에 안 왔으면 이런 진리를 모르고 죽었겠구나” 하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바깥세상에 나온 뒤 좋은 책이 있어도 시간이 부족해 읽지 못할 때면 감옥이 그립기까지 했다. “감옥에 다시 한번 갔으면 좋겠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충동을 몇 차례 느꼈다.

감옥 생활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다. 내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며 분노하지 않으려 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우리 국민과 역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2차 미국 망명길

그렇게 지내던 82년 12월, 안기부 간부가 불쑥 찾아와 물었다.

“몸도 불편하시다고 하던데, 미국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여전히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지와 시민·학생들을 두고 홀로 타국으로 편히 떠날 수 없었다. 몸이 불편했지만, 미국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정 뜻이 그렇다면 나를 풀어주고, 국내에서 치료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며칠 뒤 아내가 면회를 왔다. 병 치료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고 했다.

“우리가 미국으로 가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구속된 분들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전두환 정권이 아내에게 모종의 제안을 했다. 그해 12월 23일 나는 조국을 떠났다. 72년 10월 유신으로 일본에서 망명한 지 10년 만에 또다시 미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3220)을 보실 수 있습니다.

▶14회 〈미국 망명객의 삶 2년 2개월〉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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