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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정전 70년의 아픔…잊을 수 없는 6·25 때 평양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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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1950년 10월이었다. 3개월 동안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촌 노고산은 전쟁터였음에도 우리 집과 두고 떠났던 가족 모두 무사했다. 집에 돌아온 얼마 뒤였다. 중앙학교 제자인 선우문옥군과 한 친구가 늦은 저녁때 찾아왔다. 모레 아침에 정부에서 최초로 후생 열차가 평양까지 떠나는데 고향에 다녀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서 군복과 신분증을 내놓았다. 뜻밖의 일이었으나 나에게는 고향 가족을 위한 구원의 소식이었다.

기차로 떠난 다음 날 늦은 아침에 나는 대동강 동쪽에서 나룻배로 대동문 앞에 도착했다. 약간 늦은 오전 고향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나타나리라고 생각도 못 했던 큰딸 성혜가 머뭇거리다가 품 안에 안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3년 전 세 살짜리를 두고 탈북했던 나였다.

제자 도움으로 전쟁 중 평양 방문
공산 정권에 처형된 친척들 많아
중공 개입하며 동생들과 남으로
평양에 남은 어머니 부산서 재회

6·25 3년 전 세 살짜리 딸 두고 탈북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전쟁 때 얘기와 그동안에 있었던 사건을 들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사촌 동생인 원석이가 평양 공직에 있었는데 공산당에 협력하지 않고, 국군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며칠 후 숙모님이 꿈을 꾸었다. 원석이가 나타나 “저는 먼저 갑니다”라며 작별 인사를 받았는데,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깨었다고 한다.

숙모님은 백방으로 아들을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두 달 후 평양 동쪽 미림리 호수에서 200구 정도의 시신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죽인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숙모님은 시신 허리띠에서 아들이 중학교 졸업 때 받은 기념 버클을 보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동네 유지 중 한 분이었다. 할머니가 칠골 강씨 집안이었다. 큰아들을 임신하고 친정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도 김일성을 임신해 고향에 와서 같은 때에 해산했다. 그때 김일성 어머니가 유방이 곪아 젖을 먹일 수 없어, 외할머니가 3개월 동안이나 젖을 먹여 주었다. 그런데 큰아들 영수, 둘째 영국이 반공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막내 영훈은 형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 춘천 북쪽에서 복무했다. 외할머니는 “그때 그놈 새끼를 젖꼭지로 콧구멍을 막아 죽였어야 했는데 원통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지금도 세 외삼촌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외할머니가 젖도 먹인 김일성

내가 칠골 창덕소학교 5·6학년에 다닐 당시 김일성은 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 있었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인 강면석이 있었다. 김일성의 모친과는 가까운 인척간이다. 반공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면석의 가족들이 시신을 집으로 옮겨와 옷을 갈아입히다가 가슴에 안고 있던 젓가락으로 만든 십자가를 발견했다. 후에 김오성 목사님이 그 젓가락 십자가를 갖고 월남해 교인들에게 북한의 기독교 박해 모습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내 소꿉친구 영길이는 공산당의 지령으로 아내와 두 아들을 평양에 남겨두고 북쪽으로 도피했다. 그의 장인 전영택 목사는 잘 알려진 소설작가이다. 딸과 외손자 둘을 서울로 데려오면서 영길에게 꼭 월남하라고 소식을 남겼다. 그러나 당원이었던 영길은 그대로 남아 공직을 계속했다. 내 뒤를 이어 학교장이 되었던 윤 목사는 당원이 될 수 없어 좌우 양측의 버림을 받아 만경대 밑 대동강가에서 처형되었다.

여덟 식구와 함께 다시 부산에

이런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며칠을 보냈는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이남까지 후퇴한다는 뉴스였다. 나는 서둘러 떠나야 했다. 두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성혜를 이끌고 나섰다. 만경대 대동강가에는 벌써 웅성대는 분위기였다. 나룻배를 얻어 타고 강 동쪽 역포까지 왔다. 군용기차와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에야 부모님을 남겨둔 것이 큰 잘못임을 알았다. 큰동생에게 서울과 부산의 주소와 머물 곳을 적어주면서 빨리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나는 여기저기 헤매다가 남행하는 군용기차로 갔다. 군 장교에게 간청해 기관차 뒤에 연결되어있는 석탄 칸에 자리를 얻었다. 큰 어려움 없이 다음날 이른 아침 수색역까지 올 수 있었다.

모두 사랑하는 ‘평화의 때’ 소망

그러나 전세는 급변했다. 다시 여덟 식구가 된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떠났다. 3개월 머물렀던 대연동 교회로 돌아왔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 부모님은 고향에 머물러도 목숨은 보존될 수 있지만 동생은 발각되면 체포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죄책감에 시달려 고민하다가 혼자 서울 빈집까지 와 보았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그해 마지막 날 저녁때,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던 기도를 드렸다. “연말인 오늘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기도였다.

기도를 마치고 교회 뜰 안으로 나왔다. 누군가가 대문 입구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사모가 문을 열어 주면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동생을 포함한 어머니, 사촌 남녀 동생이 들어섰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해가 다 가기 전에…”라고 기도를 드리곤 했기 때문이다. 부친과 숙부는 황해도를 거쳐 해주 쪽으로 먼저 떠나고 어머니 혼자 남아 계셨는데, 어머니도 가족들을 위해 평양에서 부산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오셨다. 나는 새해 새벽 기도를 드렸다. “우리 어머니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이 갖는 평화의 때가 올 수 있게 해주세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