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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학폭 법률만능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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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995년 청소년폭력예방재단(현 푸른나무재단)이 설립됐다. 학교 폭력서클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만든, 최초의 학교폭력 관련 시민단체였다. 학폭이 사회문제로 인식된 계기다. 그해 경찰은 2개월간 단속을 벌여 9068명을 구속했다. 폭력서클 근절 중심이던 학교폭력 정책은 서서히 변화했다. 2004년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폭예방법’)이 시행됐고, 피해학생 보호조치가 처음 명문화됐다. 세월은 흘러 최근 5년(2018~2022년)간 학폭으로 구속된 청소년은 65명에 그친다. 그러나 학폭 피로도는 20여년 전보다 높은 듯하다. 법만 있으면 다 된다는 법률만능주의가 교육을 지배한 탓이다.

학폭예방법은 그간 십수 차례 개정됐다. 2019년에는 경미한 사안은 학교장 재량으로 처분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교육지원청 산하기구에 심의 기능을 넘겼다. 그러나 사안 접수, 피·가해 분리의사 확인, 교육지원청 보고, 사안 조사 및 관련 학생 면담, 학부모 면담, 교내 전담기구 심의를 거쳐 다시 교육지원청에 보고하고 최종 조치 결정을 생활기록부에 기록·이행하는 건 학폭 담당 교사 몫이다.

법에 따라 교사는 비밀을 유지하고, 처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매뉴얼을 따르지 않으면 민·형사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매뉴얼대로 하면 학생과 학부모가 공감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제기한다. 학교폭력 담당 교사들은 교육자가 아니라 경찰이자 학부모의 민원을 상대하는 감정노동자라는 자괴감을 느낄 정도다.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를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학폭 징계에 불복하는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이 급증했다. 대입에 불이익을 받느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소송으로 학교와 피해자를 괴롭히는 갑질을 택하는 거다. 올해 정부가 내놓은 학폭 근절 종합대책에선 가해 기록을 졸업 후 최장 4년까지 남기는 것으로 강화했다. 힘 있는 학부모들이 법 기술자를 동원해 더 정교한 갑질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저출산에 자녀가 귀한 시대인지라 학폭도 아닌 걸 피해자라며 신고하는 부모들도 있다. 초등 저학년까지 학폭 논란에 휘말리니 아이들은 놀면서, 다투면서 배울 기회를 잃는다. 법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는 학교에서 교육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