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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캐나다...밴쿠버선 지난달 이민자축제 12번 열렸다 [이제는 이민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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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달 17일 버나비시 스완가드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한인문화축제'에서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원이 공중격파를 성공시켰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7일 버나비시 스완가드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한인문화축제'에서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원이 공중격파를 성공시켰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어메이징 태권도!”

지난달 17일 캐나다 버나비 시(市) 스완가드 스타디움에서는 감탄과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원이 귀를 찢을 듯한 기합과 함께 공중에 뛰어오를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졌다. 두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시범단원이 360도 회전 공중 돌려차기로 3m 높이의 송판을 격파했을 때, 관객의 함성은 절정에 달했다.

이날은 캐나다 서부 최대 한국계 이민자 행사인 ‘밴쿠버 한인문화축제’가 열렸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객 5000명의 피부색은 제각각이었다. 무대에선 국기원 태권도 시범, 한국전통무용, K-POP 경연대회, 난타 등 공연이 펼쳐졌다. 떡볶이, 제육볶음, 소불고기, 한국식 치킨 등 음식을 파는 부스엔 길이 10m 대기 줄이 늘어섰다. 한국계 이민자뿐 아니라 피부색이 다른 캐나다 선주민(네이티브), 다른 나라의 이민자도 한복을 입고 윷놀이를 하면서 축제를 즐겼다. 말 그대로 ‘지구촌 축제’였다.

캐나다, 이주민 통합에 ‘진심’…축제 통해 접점 늘려 

과거 한국을 2번 여행한 적이 있다는 달시 숄츠(35)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홍어와 산낙지”라며 밝게 웃었다. 고등학생 때 한국계 이민자 친구를 통해 처음 한국 문화에 빠졌다는 그는 서툰 한국어로 스스로를 ‘한국빠(‘팬’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캐나다인은 이런 축제에서 서로를 배우고 다른 문화를 공유하며 다양한 민족, 인종과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7일 열린 '한인문화축제'를 찾은 달시 숄츠(35)는 ″한국계 여성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7일 열린 '한인문화축제'를 찾은 달시 숄츠(35)는 ″한국계 여성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축제를 주최한 신동휘 밴쿠버한인문화협회 회장은 “첫 축제가 열린 20년 전에는 한국계 이민자와 주류 사회의 접점이 거의 없었다”며 “축제를 통해 알게 된 선주민과 지속해서 교류하며 구직까지 이어지는 등 일상에서도 선순환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캐나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민 정책을 가진 나라로 꼽힌다. 특히 이민자의 정착과 사회 통합에 ‘진심’이다. 이민 정책의 성패가 ‘이주민 유입→체류관리→통합’의 유기적 연계에 달려 있다고 믿어서다.

이민자를 받아들이기만 하고 통합을 놓치면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시위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27일 교통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알제리계 10대 소년이 프랑스 경찰 총격에 숨진 뒤, 프랑스 전역에서 폭력 시위가 수 일째 이어졌다. 소년이 ‘이민자’였기 때문에 차별을 받아 죽었다는 분노가 다른 이민자에게 퍼지며 시위가 격화한 것이다.

안트예 엘레르만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연구소장이 지난달 13일 밴쿠버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안트예 엘레르만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연구소장이 지난달 13일 밴쿠버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안트예 엘레르만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이민연구소장은 “이민과 통합은 불가분 관계”라며 “이민자를 환대하는 문화와 제도는 캐나다가 이민자에게 각광받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각기 다른 문화의 조화, ‘모자이크’ 이민 철학

캐나다 이민 정책의 철학인 ‘모자이크’는 이민자가 각자 정체성과 문화를 간직한 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날 한인문화축제에 참석한 타코 반 폽타 보수당 하원의원은 “서로 다른 조각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모자이크처럼 이민자와 선주민이 자유민주주의라는 핵심 가치 아래 모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채로운 이민자 축제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이 한 곳에 모여 각자의 음식, 음악, 스포츠를 즐기며 자연스럽게 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서다. 지난달 캐나다 밴쿠버에서만 최소 12개 이상의 이민자 축제가 열렸다.

지난달 16일 코퀴틀람 타운센터 공원에서 개최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축제를 찾은 시민들이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6일 코퀴틀람 타운센터 공원에서 개최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축제를 찾은 시민들이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6일 코퀴틀람 타운센터 공원은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축제인 ‘브리티시 컬럼비아 하이랜드 게임’ 참가자로 붐볐다. 올해로 91회를 맞이한 이 축제에선 이틀에 걸쳐 스코틀랜드 전통 음악, 춤, 스포츠 경연이 펼쳐졌다. 이날 메인 무대가 있는 노천극장엔 300여 명의 관객이 삼삼오오 앉아 오프닝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4세대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무대에 오른 마이크 쉬즘 총괄 디렉터는 “오늘 같은 축제는 캐나다의 모자이크 철학을 잘 보여준다”며 “스코틀랜드 커뮤니티뿐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를 연결하고, 미래 세대에게 서로의 문화를 계승하는 일은 캐나다가 가장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백파이프 밴드가 오프닝 공연을 하는 모습. 지난달 16일 코퀴틀람 타운센터 공원에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축제 '브리티시 컬럼비아 하이랜드 게임'이 개최됐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백파이프 밴드가 오프닝 공연을 하는 모습. 지난달 16일 코퀴틀람 타운센터 공원에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축제 '브리티시 컬럼비아 하이랜드 게임'이 개최됐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이어 등장한 35명 규모의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백파이프 밴드가 공연의 막을 열었다. 백파이프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악기다. 짙은 백파이프 음색과 흥겨운 드럼 연주가 노천극장에 울려 퍼졌다. 초록색 킬트를 입은 두 살배기 아들과 연주를 감상하던 애런 존(25)은 “나는 네이티브지만 이민자 행사를 좋아해 1년에 2번은 꼭 간다”며 “두 살때부터 이런 축제에 온 아들은 나중에 쉽게 이민자와 친숙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찾은 써리 시청 광장에선 생소한 선율이 흘러 나왔다. 축제 관계자에게 무슨 음악이냐고 물으니 “반그라(Bhangra)”라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반그라는 인도 펀자브 지방 전통 음악과 서구의 팝이 혼합된 대중음악 장르다. 펀자브 지방은 시크교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날 축제엔 시크교도의 상징인 터번을 쓰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곳곳에 보였다.

무대 아래에선 백인과 인도계 이민자가 뒤섞인 10여 명의 무리가 팔과 다리를 역동적으로 흔들며 무아지경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나투나투’ 춤이었다. 지난해 개봉한 발리우드 영화 ‘RRR’에 등장한 춤으로,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이 커버댄스를 추는 등 지난해 전 세계에서 히트했다. 펀자브 지방 이민자를 주축으로 열린 ‘5X : 남아시아 청소년 문화 축제’의 ‘메인 댄스’도 이 춤이었다.

지난달 17일 써리 시청 광장에서 열린 '5X : 남아시아 청소년 문화축제'에서 인도 펀자브 출신 이민자 러브 비르크(23)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7일 써리 시청 광장에서 열린 '5X : 남아시아 청소년 문화축제'에서 인도 펀자브 출신 이민자 러브 비르크(23)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이날 검은 터번을 쓴 채 무대 위를 누빈 러브 비르크(23)는 인도 펀자브 출신 캐나다 영주권자였다. 그는 중독성 있는 DJ 비트에 맞춰 유튜브 50만 조회 수의 반그라 곡 ‘고향’을 열창했다. 관중의 환호 속에 무대를 내려온 그는 “캐나다는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곳”이라며 “내가 시크교도라는 사실이 가수의 꿈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캐나다, ‘통합’에 1조원 쓴다

이민자 정착과 통합에 관한 캐나다의 진심은 축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상에서의 이민자 지원은 비영리단체(NGO)가 담당한다. 밴쿠버 최대 이민 지원 비영리단체 ‘석세스(S.U.C.C.E.S.S)’가 대표적이다. 1973년 홍콩계 이민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이 단체는 현재 총 150개국의 이민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원만 900명이 넘는다. 지난해 수혜자는 총 5만9557명으로, 밴쿠버 신규 이민자 25%가 석세스의 서비스를 이용했다. 캐나다 이민부에 따르면 석세스와 비슷한 규모의 이민자 지원 단체가 캐나다 전역에 15개나 있다.

지난달 14일 이민자들이 밴쿠버 최대 이민 정착지원 비영리단체 '석세스'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지난달 14일 이민자들이 밴쿠버 최대 이민 정착지원 비영리단체 '석세스'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석세스의 ‘대표 작품’은 ‘이민자 밀착·통합 프로젝트(AIEP)’다. 이는 처음 캐나다에 오는 이민자가 국경을 넘기 전, 현지에서 취업·교육·주거 등 준비를 돕는 프로그램이다. 이민자가 회계사라면 캐나다에 오기 전 자격증을 변환할 수 있게 돕고, 곧장 일을 시작할 수 있게 유관 협회 관계자를 소개하는 식이다. 캐나다 부동산 업자와 교육청 관계자를 섭외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석세스는 한국에도 있다. 지난 2009년 서울 정동에 한국 지부를 세웠다. 지난해에만 한국계 이민자 5000명이 이 곳을 이용했다. 이외에도 이민자가 캐나다 공항에 도착하면 패딩 등 ‘웰컴 키트’를 제공하고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도 있다. 퀴니 추 석세스 대표는 “언어와 문화 장벽이 있는 이민자가 캐나다에 도착해 정착을 준비하면 너무 늦다”며 “미리 준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서비스인데, 지금은 다른 이민 지원 비영리단체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밴쿠버 최대 이민 정착지원 비영리단체 '석세스'의 대표 퀴니 추가 지난달 1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밴쿠버 최대 이민 정착지원 비영리단체 '석세스'의 대표 퀴니 추가 지난달 1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밴쿠버=이영근 기자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서비스는 무료란 사실이다. 이민 지원 비영리기관의 예산 대부분은 캐나다 정부가 지원한다. 캐나다 이민부는 올해부터 내년까지 이 같은 이민자 정착·통합 지원 프로그램을 위해 11억3000만 달러(약 1조4900억원)를 집행할 예정이다. 870만 인구의 퀘벡주 예산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레미 라리비에르 이민부 미디어 담당은 “캐나다의 많은 정착 지원 단체는 신규 이민자와 선주민의 가교가 된다”며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캐나다로 가져온 이민자들은 도착 전후 정착 서비스를 지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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